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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自) 자의 기원이 뭔지 아세요?” 영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영문학자는 자기 코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코입니다, 바로 이 코.” 믿기지 않았다. 모임의 뒤풀이, 농담이 오가는 자리여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다. 다음 날 한자의 기원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가 간밤의 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맞았다. 자(自)의 갑골문 자형은 사람의 코를 본뜬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신을 가리킬 때 손으로 자기 코를 가리킨다고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영문학자는 말했다. “얼굴 중에서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권은 그 다음이었다. “문제는 자기 코가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전날 밤 그랬듯이 내 두 눈은 내 콧잔등을 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콧잔등의 윤곽만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것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대단한 메타포였다. 보이되, 잘 보이지 않는 코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 고대 중국인들의 생각이 놀라웠다.

물론 자기 입과 두 귀도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보이면서도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고대 중국인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3000년 전 갑골문 시대의 자기 인식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우리를 뒤흔드는 걸 보면, 우리가 자부하는 진화와 진보는 여전히 도구와 기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디지털 기억 장치에 담아놓고 수시로 검색하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아직 지혜의 경지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과 코의 관계는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관계와 대응한다. 눈이 코에 초점을 맞출 수 없듯이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장악하지 못한다. 분명 마음속에 있지만, 마음으로 포획할 수 없는 다른 마음들이 있다. 마음 곳곳에 마음의 오지(奧地)가 있다. 마음이 볼 수 없는 마음들. 코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두 눈을 중심으로 얼굴을 이해해왔던 그간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코가 얼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눈과 입, 귀도 다르게 보였다. 얼굴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코가 화두로 떠오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졸시 때문이다. ‘얼굴’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진즉 코의 갑골문 자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영문학자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시가 달라졌을 것이다. 코가 첫 연의 핵심, 얼굴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얼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타인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타인 지향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외모지상주의, 명품 열풍,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시 ‘얼굴’에서 부각시키고 싶었던 타인은 그런 타인이 아니다. 타인의 눈에 위축되는 ‘나’는 주체적 인간이 아니다. 소비자일 따름이다. 이때의 타인 역시 소비자다. 다른 소비자들의 눈치를 보는 소비자.

드라마 '왕의 얼굴'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소비자에서 주체적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타인’ 앞에 서야 한다. 나는 타인의 타인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타인이다. 소비자의 눈을 벗어버리면 이방인, 낯선 사람, 나그네, 노약자, 이웃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들이 저마다 사람으로 보인다. 졸시 ‘얼굴’은 큰스님과 한 소년의 대화가 모티브였다. 소년이 큰스님께 여쭙는다. “스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큰스님이 웃으며 답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경전의 번안이었겠지만, 나는 저 짧은 대화에서 타인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한 존재, 유일무이한 생명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지인(知人)이다. 이것이 환대의 제1 원칙일 것이다.

도처에 거울과 유리창이 있고 수시로 ‘셀카’를 찍는 세상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얼굴과 마주하는 시대다. 하지만 얼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은 많아졌지만 타인을 위한 얼굴, 타인을 맞이하는 얼굴은 찾기 힘들다. 우선 두 눈으로 자기 코(自)부터 살펴보자. 그리고 자주 물어보자. 내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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