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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소(한경연)는 2013년 4월25일 ‘바른 용어를 통한 사회통합의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핵심 주장은 ‘사회통합을 위한 바른용어’라는 연구서로도 나왔다. “시장과 정부를 보는 삐뚤어진 시각을 규명하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1889~1976) 말까지 인용한 보고서는 사뭇 비장하다.

이 보고서가 바른용어 1순위에 올린 게 ‘시장경제’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소득격차는 시장경제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의도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과당경쟁, 목따기 경쟁, 먹고 먹히는 경쟁 같은 용어는) 시장경제의 속성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그것을 ‘자유경쟁’이라는 용어로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로 ‘양극화’의 바른용어는 ‘소득격차’다.

시장경제는 어떤 ‘비뚤어진 용어’를 대체할까? 바로 자본주의다. 전경련과 한경연의 눈엔 ‘정글자본주의’ 같은 말이 뒤틀렸다. 그래서 나온 바른용어가 ‘상생경제’다. 완곡어법으로 점철된 이 보고서의 압권이다.

시장경제라는 말은 범개혁 진영도 자주 쓴다. 한 예로, 더불어민주당의 논평·브리핑을 검색해보면 시장경제가 자본주의보다 두 배가량 많이 나온다. 부정의 맥락에서 쓴 게 아니다. 전경련과 한경연 뜻대로 시장경제란 용어는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룬 셈이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정명(正名)? 헌법재판관 후보로 나온 이미선의 주식 과다 소유·거래가 논란이 됐을 때 자본주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식거래 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따라가면 자본주의 시장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이해찬 민주당 대표) 이다. 이미선의 남편인 변호사 오충진은 “주식 많다고 까는 야당 놈들은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망각하는 무뇌아들”이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그렇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국가다. 이미선을 둘러싼 정쟁과 논란에서 건질 게 하나 있다면 현 지배 집단에서 나온 ‘자본주의’라는 말이다. 뜻밖에 나온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정명에서 다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이미선을 옹호하는 말에서 나타났듯,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한다. 여기에 진정성이니 선의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투자’라는 게 그렇다. 시민들은 종종 악덕 기업을 대상으로 불매 운동을 벌이곤 하지만,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았다고? 한국 자본주의(시장경제) 발전을 위해 이 기업엔 투자하지 않아야겠군’이라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은 거의 없다. 이미선과 오충진이 주식을 산 이테크건설이 그렇다. 2017년 당시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이 9월 낸 자료를 보면, 이 회사의 장애인 고용률은 1% 미만이다. SK케미칼 임원이 가습기 살균제 흡입 독성 은폐 혐의로 구속된 다음날도 이 회사 주식은 전일 대비 0.14% 올랐다. ‘바이오중유 연료 상용화’ 기대감 때문에 보합세를 유지한 것이라고 한다. 

지난 10일 경기 수원의 한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노동자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가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착한’ 자본주의, ‘나쁜’ 자본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니, 정의로운 사회니, 공정한 사회니 하는 아름다운 수식의 말과 선언의 말로 쉬이 덮을 수 없는 게 자본주의 문제다. 촛불집회와 정권교체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다. 좌파니 우파니, 빨갱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겉으로 드러난 대립 밑에 깔린 공유점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 사수와 옹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양분한 세력이 ‘친자본주의’를 공통분모로 한다는 사실은 종종 망각된다.

20대 일용직 노동자 김태규가 지난 10일 아파트형 공장 신축 건설현장에서 화물용 승강기에서 추락해 숨졌다. 안전화 대신 운동화를 신은 채 발견됐다. 시공사는 일용직 노동자라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전화를 아낀 비용은 누군가의 이윤으로, 자본으로 축적됐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4개 하위법령 개정안의 후퇴는 다시 누군가의 이윤으로 돌아갈 것이다. 

경향신문은 최근 김태규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대표)과 인터뷰했다. 그는 매년 산재 발생 추이를 보면 일정한 흐름이 나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건설경기가 좋으면 건설업에서 그만큼 사망자가 늘고, 침체되면 사망자가 줄어듭니다. 이게 한국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 문장 ‘사망자’ 자리에 ‘이윤’을 넣어보라.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가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나는 게 산업재해다.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날이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희생된 수많은 김태규, 김용균의 명복을 빈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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