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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담당 기자를 하면서 교사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우리 교육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라는 것이었다. 초등, 미취학 아동까지 사교육이 급증하며 놀이터에 아이들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도, 선망의 직장을 향한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부쩍 독해지고 폭력적이 되어간 것도, 교사들 간의 연대가 무너진 바탕에도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했다.

가르치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배웠다. 부모가 직장에서 잘리고, 삼촌의 사업이 망하고, 어른들의 이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친구를 밟고 올라서 1등을 하고 각종 자격증으로 무장해야 정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공무원, 선생님이 유난히 인기직종이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최근 유행어가 된 ‘각자도생’의 씨앗이 싹튼 것도 알고 보면 외환위기 사태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다.

2016년 11월. 대한민국이 목도하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절망적인 현장은 아이들의 삶을 외환위기 못지않게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 세대는 또 한번 격랑을 맞고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부모님을 따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에 나온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주말, 100만 시민이 “박근혜 하야”를 외칠 때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은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명절 때도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아이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닷새 앞둔 이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뭐가 그리 절박했을까. 아이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였다.

“1919년 3·1운동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이곳에서 오늘은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겠습니다.”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선 사회자의 발언과 함께 전국 청소년 시국대회가 열렸다.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우리 선배들이 피와 몸을 내던지며 겨우겨우 얻어낸 민주주의입니다. 그런 민주주의를 박근혜 정부는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경기 이천 중3), “끔찍한 악몽을 꾸는 나라를 깨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남이 아닌 내가 먼저 일어나 나라를 깨우는 겁니다. 대한민국 청소년, 민주주의 파이팅!”(강원 원주 고2), “우리 학생들이 학생들의 힘으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무너져 버린 민주주의와 정의를 바로 세웁시다”(경기 성남 고3). 각지 학생들의 ‘사이다 발언’마다 수천명 학생들의 지지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중학교 사회교과서 속 민주주의는 ‘주권이 다수 국민에게 있고 국민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며, 정치권력이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행사되는 정치 형태’라고 설명돼 있다.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아이들이 나선 것이다. 모든 것이 전복되고 허물어진 사회. 아이들이 거리에 나와 자신들이 살고 싶은 미래를 외쳤다.

“저희는 우리나라에 태어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싸우는 것은 과거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조상분들에 대한 대답이고 현재 우리 스스로를 위한 혁명의 발걸음이며 미래 후손들을 위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어른들이 못한다면 우리 학생들이 나서서 심판해야 합니다.”

<학교라는 괴물>의 저자인 권재원 교사는 우리 교육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아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른이 아이들을 죽인 사건으로, 더 나아가 국가가 아이들을 버린 사건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권 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절망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신뢰를 잃어버린 어른들이 할 일은 뭔가. 권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현실을 바로잡는 것까지가 교사의 책무에 추가됐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른들이 해야 할 몇 가지를 더하고 싶다. 한 달 전쯤 ‘비선 실세’ 최순실 딸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특혜 의혹을 받고 있던 이화여대에는 ‘부끄러움은 왜 학생의 몫인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이 현수막처럼, 이번 게이트를 관통하는 핵심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끄러움이다. 우선 이 땅 대부분의 평범한 어른들은 이런 사회를 만든 것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다음으론 IMF 체제 이후 20년을 지배했던 ‘각자도생’을 깨고 세대를 넘은 연대의 두 팔을 벌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적인 시민 항쟁의 시기였음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아픔과 실망을 준 어른들의 최소한의 도리다.

송현숙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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