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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 레이스를 보면서 퇴락해가는 유랑극단의 쇼가 생각났다. 낡은 레퍼토리, 출연진의 꼰대 같은 태도, 유행보다 10년은 뒤진 듯한 스타일…. 골수팬을 제외하면 찾는 사람도 거의 없고, 공연 때마다 극장에는 적막이 흐른다. 지루함을 못 이긴 일부 관객들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다. 본전 생각이 나는 듯 억지로 고개를 들지만, 오래 버티진 못한다. 등돌린 팬들을 되찾고, 젊은 관객층을 끌어오겠다며 야심차게 준비했던 쇼는 이렇게 흥행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인가.   

오랜 궁리 끝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니다. 한국당 안상수 의원에게 아이디어를 빚졌다. 안 의원은 23일 당권주자 중 첫 출마선언을 한다면서 국회에서 격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허이짜!” 기합과 함께 그의 주먹은 ‘좌파정권’ ‘계파정치’ ‘대권주자 비켜!’라고 쓰인 널빤지를 반으로 갈랐다. 화려한 파란색 양복 차림에 비장한 표정의 그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차력사’가 떠올랐다. 전성기가 지난 지 오래됐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짜내는 ‘웃픈’ 차력사.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에서 세번째)과 2·27전당대회 당권 예비주자들이 24일 국회에서 개최된 전국지방의원 여성협의회 발대식에서 손을 잡은 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그러고보니 퇴락한 유랑극단 이미지는 한국당 전대와 썩 들어맞았다. 홍준표 전 대표는 또 어떤가. 지난 6월 지방선거 공연 흥행참패 원흉으로 지목됐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다시 무대에 올랐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독설, 가죽점퍼로 골수 관객 눈살도 찌푸리게 했던 흑역사는 잊었다. “막말 프레임으로 온갖 음해를 받아가며 남북, 북·미 위장평화쇼의 와중에서 28프로(%) 정당까지 만들어 자유한국당을 겨우 살려놓았다”고 외쳤지만 박수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냉담한 반응에 속이 탄 듯 그는 연신 콜라를 들이켠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퇴물 코미디언의 모습이 겹쳐진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세월을 되돌리진 못했다. 짧게 깎은 머리, 댄디한 옷차림은 잘나가던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반응이 썰렁하다. 대권에 눈먼 그가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시장직을 내던진 것이 몰락의 시작이라고 골수 관객들은 생각한다.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듯 그는 “핵개발에 대한 심층적 논의를 촉발해야 한다”고 우렁차게 외친다. 비핵화 협상 와중에 핵개발이라니…. ‘핵 포기하지 마라. 적대적 공생관계로 살자’고 북한에 요청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한때 ‘보수개혁 아이콘’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린다. 아우라를 벗고, 예능 프로에서 망가지는 흘러간 스타 같다고나 할까.

드디어 등장한 메인 게스트 황교안 전 국무총리. 박수소리가 커졌다. 전임 박근혜 단장 시절 총무를 본 덕분에 극단 업무에 익숙한 데다, 막말의 홍준표 전 대표와 비교되는 정돈된 언사로 무대에 오를 만한 호소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일찍부터 받았다. 그는 무대에 올라 “많은 분과 만나 소통하고 함께 일할 각오로 정치권에 들어오게 됐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핵심을 요리조리 피한 원론적 발언이 계속되면서 분위기는 빠르게 식어간다.

그러자 황 전 총리가 던진 필살기. “통합진보당 해산한 사람이 누굽니꽈~.” 아뿔싸, 음이 이탈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정치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근본 원칙을 어겼다고 동네방네 떠든 꼴이다. 일부 관객들은 “기다렸던 말”이라고 열광했지만, 또 다른 관객들은 “저런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면서 고개를 흔든다. 그에게 심금을 울릴 트로트를 기대했건만 중저음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자장가에 걸맞은 듯하다. 그는 망해가는 쇼의 구세주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내가 무대에 오르겠다’고 아우성쳤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무대 체질이 아닌데도 직접 마이크를 잡으려다 냉담한 주변 반응에 포기했다. 혼자 그만두기는 억울했는지 “친박 프레임과 탄핵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당 기여도 역시 낮다”며 황 전 총리에게 무대에서 내려올 것을 공개 촉구했다. 김무성 의원은 “위기가 오면 나서겠다”고 은퇴 선언을 번복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 심재철·정우택 등 존재감이 희미한 주자들은 황교안 불가론을 펴면서 ‘황교안 바람’에 묻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니, 쇼가 잘될 리 없다. 출연자들은 빈 좌석을 메워준 강경보수층을 위해 갈수록 극단적인 발언들을 던진다. 썰렁함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편성된 ‘릴레이 단식농성’ 레퍼토리는 ‘웰빙 단식쇼’ ‘간헐적 단식쇼’라는 야유를 불렀다. 무대 밖 스태프들은 친박·비박으로 편 갈라 “저 출연진은 누가 섭외했느냐” “왜 막말을 미리 걸러내지 못했느냐”며 다툰다. 쇼의 평판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흥행 전망은 암울하다. ‘자유 유랑극단’은 언제쯤이나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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