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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국토 개발을 경험한 사회가 갖는 공통적 특징은 ‘새것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나타난다. 1970년대 이후 ‘새로운 도시’의 창궐은 ‘신’(新)이나 ‘뉴’(New)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케 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1990년 처음 서울을 방문했을 때 본 대단지 아파트에 충격을 받아 저서 <아파트 공화국>을 쓰면서 아파트가 그 거대함을 어떻게 확장해 나가는지 방식을 이렇게 분석했다.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이며 상징”인 한국의 아파트는 동시에 “재화”이고 “어떤 의미에서 투기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도 책에 담았다.

이방인의 눈에도 목격된 아파트의 ‘욕망’은 결국 단지 밖 사람들을 배척하는 촉매가 돼 이곳을 섬처럼 고립시켜버리기도 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진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의 주민 안내문을 보면 아파트 안팎의 괴리감이 뚜렷해진다. 이들은 인근에 새로 지어질 청년임대주택을 ‘5평형 빈민아파트’라고 규정하며 ‘아파트 가격 폭락’ ‘아동, 청소년 문제, 불량 우범지역화 우려’에 따라 막아야 한다고 했다. 도시의 주거빈곤층이 된 청년들을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주택에 ‘빈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자 비판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집값은 (어른들이) 폭등시켜 청년들이 주거 안정이 되지 않아 집이라도 구해주려는 것인데…”(@by***), “청년혐오다. 언제부터 청년이 슬럼가를 형성하고 질이 나쁜 존재였나. 자신들의 청년 시절도 그랬나”(@se***). 논란이 커지자 해당 안내문을 떼어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까지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5평형 빈민아파트 신축 건’이라는 제목의 안내문. 페이스북

경기 남양주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택배차량의 진입을 금지했다. 택배차에 주민이 치일 뻔한 사고가 발단이 됐다. 단지에는 ‘아파트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해 지상 차량을 통제한다는 공문이 붙었다. 사실상 집 문 앞까지 접근할 수 없게 된 업체들은 정문에 물건을 놓고 가거나 이곳을 ‘배달불가 지역’으로 지정해 맞대응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택배가 쌓여 있다. 이 아파트 단지는 택배 차량 지상 진입을 통제하고 정문 근처에 주차 후 카트로 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지만 택배 업체들은 아파트 정문 인근 도로에 택배를 쌓아두고 가는 방식으로 맞서면서 갈등을 빚었다.연합뉴스

아파트 측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택배함에 놓고 가면 된다’는 입장이지만 차고가 높은 택배차량은 지하로 진입할 수 없다. 그러자 “차량을 바꾸면 된다는 주민도 있던데 기사가 자기 차량을 택배회사와 계약을 맺고 배달하는 구조에서 차까지 개조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2500원(택배비)의 갑질”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또 차 대신 수레로 택배를 가지고 온다면 된다는 주민에 대해선 “안전을 우려해 차량 진입을 막는다면 집 앞까지 택배가 도착하지 않는 불편은 주민들이 감수해야지 불편함은 택배기사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최근 서울 강남 및 동부이촌동, 경기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는 ‘우리 아파트를 싸게 내놓지 마라’ ‘싸게 팔면 매물을 주지 말자’며 부동산 중개업소를 압박하다 법적 분쟁으로 번지는 일도 일어났다. ‘내 아파트의 품격’을 항한 결연하고 강렬한 욕망이 이제 사회 갈등이 되는 수위에 다다랐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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