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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매화 꽃봉오리가 젖꼭지처럼 부풀었을 때였다. 별 기별도 없이 그는 톱과 사다리를 트럭에 싣고 내 작업실로 왔다. 폭설을 뒤집어쓰고 쓰러진 마당의 소나무를 일으켜 세우는가 싶더니 우지직 끊어졌던 가지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내가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게 안중근 의사 유묵 소장 여부를 물었다가 뜬금없이 검찰에 기소당했을 때에도 그는 법원 앞에 누구보다 빨리 얼굴을 내밀었다.

“자네도 그런가? 나도 분이 안 풀려서 긍가 입맛도 없고 통 잠도 안 오네.”

그는 세월호 참사 얼마 후에 나를 호출했다. 급한 일을 대충 마무리한 나는 그의 집으로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집 마당에 당도했을 때 그는 없었다. 마당 귀퉁이에 걸린 화덕에서 뭔가가 푹푹 끓고 있었는데 김이 올라오는 솥단지 뚜껑을 열어보니 토종닭 두어 마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다. 자전거 앞쪽과 뒤쪽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구조 0명, 진상을 밝혀라!’라는 구호가 코팅된 채로 붙어 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세월호 참사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면소재지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장터이든 정류장이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세월호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그는 다름 아닌 내 친구 정진섭이다. 언제나 나를 속수무책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내 친구 정진섭과의 인연은 내 시집 <그리운 여우>와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중반, 나는 전교조 해직교사로 살다가 전북 장수군 산서고등학교로 복직을 했다. 거기서 그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그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그 시집을 들고 몇 년 후에 나를 찾아왔고, 턱수염이 늘 덥수룩한 그와 단번에 마음이 통했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은 그를 유혹해 친구 삼자고 꼬인 것도 나다. 그는 시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군대에 가기 전 20대 초반에 이미 시인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이었다. 농사일도 하고 목수일도 하는 내 친구 진섭이. 그는 샘이 날 정도로 시를 잘 쓰는 친구이기도 하다. 정진섭은 1984년 ‘현대문학’ 400호 기념 지상백일장에서 장원을 해 1회 추천을 받는다. 그때 심사위원은 박재삼 시인과 김춘수 시인이었다. 그때 현대문학에서 1회 추천만 더 받았다면 그는 진즉 큰 시인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장수 촌놈인 그는 흘려보냈어도 좋을 한마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너, 그거 했다가는 가난에서 못 벗어나니 절대 그거 하지 마라!”

당시 국어 선생님이던 고종형님의 말을 듣고 곧 갈등에 빠져들었다. 군에 다녀온 정진섭은 점차 시에서 손을 놓고 전국 각지를 떠도는 떠돌이를 자처했다. 배달원으로, 공사현장 잡부로, 탄광촌 광부로 떠돌았다. 그가 초보 광부가 되어 태백의 어느 갱도에서 일을 할 때였다. 연장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커다란 쥐가 어슬렁거렸다. 정진섭은 의기양양하게 쥐를 잡았다. 하지만 선배 광부들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쥐는 탄광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오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

가끔 그는 나를 ‘두목’으로 부른다. 시를 가르치는 자신의 두목이라는 것.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시를 가르치기보다 그를 통해 사람살이와 세상의 일을 배울 때가 많다. 마늘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지, 철쭉의 전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못된 일을 벌이는 권력자들에게는 어떤 욕을 해줘야 하는지…. 그가 나의 선생이다.

내 친구 정진섭은 작업실 보일러가 더 이상 못 돌겠다고 떼를 썼을 때도, 감나무가 깊은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을 때도 두말없이 찾아와 고쳐주고 갔다. 여름에 말벌 떼가 작업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는 자기네 집이라고 우겨댈 적에는 단숨에 말벌 무리를 박살 내고 갔다. 119 소방대원보다 빠르게 말이다.

때로는 개울에서 아내와 함께 몇 줌 주웠다는 다슬기를 들고 오기도 했고, 농사지은 햇감자며 옥수수며 양파며 참깨 같은 걸 은근슬쩍 놓고 가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맛이나 보고 말기에는 너무 많은 김장김치를 들고 왔다. “노모가 ‘짐치통’ 왜 안 찾아 오냐고 맨날 노래를 부르신당께.”

며칠 전에는 또 김장김치 한 통을 들고 와 여간 멋쩍어하는 내 앞에서 호탕하게 웃고 갔다. “작년 김장김치가 너무 짜서 올해는 소금에 절일 때 내가 옆에서 감독을 했지.”

여름철에 날을 잡아 그와 함께 낚시를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는 경운기에 텐트와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싣고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가 다루는 도마 가까이 우리는 가지 못한다. 올해 여름에도 그랬다. 고기를 굽고 닭을 삶고 텐트를 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빗소리를 들으며 밤새 통음을 한 것도 다 그의 덕분이다. 올여름에도 나는 밤늦게까지 붕어 한 마리 잡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녘에 낚싯바늘 하나로 참붕어 대여섯 마리를 조용히 건져 올렸다. 이거야말로 여지없이 기가 죽는 순간이다.

이쯤에서 정진섭의 비리를 하나 말해야겠다. 언젠가 밤에 트럭을 몰고 가다 빙판길에 미끄러졌으나 다행히(?) 파출소를 들이받고 멈추는 바람에 죽다 살아난 적이 있다. 차는 폐차되었다. 그 이후로 술 마시는 실력은 내가 한 수 위가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대체 내가 그를 앞지를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내 친구 정진섭은 올해 여든다섯인 아버지와 일흔다섯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묵묵히 산서를 지킨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아내 김숙희와 함께 알뜰살뜰 살아간다. 고등학교 3학년인 ‘가을’이와 중학교 2학년인 딸 ‘겨울’이는 아버지를 친구처럼 잘 따른다. 두 딸의 이름을 가을과 겨울이라고 지은 것만 봐도 내 친구 진섭이가 예사 시인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정진섭이 요새 시를 다시 쓰고 있다.

“내가 강호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안이하게 시 쓰는 시인들은 바짝, 긴장해야 할 터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남의 집을 고쳐주고 길 닦고 하는 일이 이제는 힘겹다고 한다. 요즘은 농사를 슬슬 지어볼까 궁리 중이다. 얼마 전에는 밭 2000평을 얻어 양파를 심었다. 나는 내년에 양파를 한 알도 사지 않고 그에게 매달릴 작정이다.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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