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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문화는 ‘나쁜 걸’ 장려한 결과가 아니다. “여자들은 문제가 많아”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기질적으로 여성이 싫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성성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파생된 편견이다. 남자는 이렇게 해야지 멋있다는 식의 주문이 많으면 “남자가 그것도 못해?”라는 핀잔에 이어 “너 여자야? 그런 것도 못하게”라는 빈정거림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천생 여자’라는 감탄사를 제어하지 않고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소용이 없다.

사회적 문제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반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걸 찾지 않는 해법은 소 잃고도 외양간조차 고치지 않는 격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사람의 얼굴, 몸, 옷차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부터 짚어야 한다. 잘생긴 사람에게 환호하고 몸매 좋은 사람 찬양하고 옷 잘 입는 거 센스 좋다고 칭찬하는 게 왜 문제냐면서 의아해하겠지만, ‘그러면서’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시야가 형성될 수 없다. 1등은 성실함의 증표이니 모두가 박수 치는 게 마땅하다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곳에서 학력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 불가능하니, 선행요인을 광범위하게 비판해야 한다. 훈훈한 광경도,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혹시나’ 이게 다른 나쁜 분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지 물어야만 좋은 사회는 가능하다. 

끔찍한 일주일이었다. 모든 참사가 그렇듯이, 고의적으로 나쁜 상상력을 발동해 지나치게 고민해야지만 국민의 생명이 지켜지는 안전의 기본원칙은 없었다. 사고가 터지면 누가 원칙을 흔들었는지 찾아내고 책임 추궁을 하기 바쁘다.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견고한 형태의 제도로 진화하지 않는다. 항상 이래야 한다는 간단한 원칙이 간단히 무너지는 이유에는 정치, 사회, 문화의 힘이 더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를 따지면 진흙탕 싸움만 벌어지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상황을 최악으로 예측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게 불가능한 ‘최적의’ 환경을 지녔다. 예방은 다 비용이다. 돈과 시간에 비례해 안전도 견고해진다. 하지만 ‘비용 절감, 이윤 증가’라는 말이 만병통치약처럼 부유하면 발생하지 않을 일을 붙들고 있는 건 대단히 비효율적인 행동으로 해석된다. 오직 목표와 성과만이 인정받는 세상이 되면, 안전관리나 예방조치는 따분해진다. 그런 교육들을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지루하게 느끼는 이유다. 사람 목숨을 저울에 올리지 말라면서 화내는 사람이 줄어들면 자기 생명 걱정하는 게 유별나게 보일 뿐이다. 안전에 ‘소홀’해지는 수준을 넘어 안전을 ‘무시하는’ 연료가 엔진을 돌린다. 

효율성의 반대편에서 국민의 생명은 도박판 위로 올라간다. 더 큰 문제는, 살얼음판 위에서 비틀거리며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그게 또 적응된다는 데 있다. 인생은 고단함의 연속이라면서, 삶은 줄타기라면서 단지 운이 좋았던 어제까지의 아슬아슬함을 반복한다.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치기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불안을 줄일 예방조치들이 또 귀찮다. 이 약한 신호를 핑계 삼은 허술한 공권력과 행정력으로 공공의 뼈대는 푸석해진다. 그게 무너진 사고를 ‘후진국형 참사’라고 한다.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연재 | 시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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