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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보니 선견지명이다. “박원순 시장에게 시민들이 기대한 건 소프트웨어나 사람에 대한 투자인데 박원순 3기로 가면 하드웨어 투자가 될 것이다.”(2017년 12월13일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 기자간담회)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시장(이하 경칭 생략)은 그렇게 바뀌었다. 단순 하드웨어 투자 수준이 아니다. 박원순 1·2기 상품인 생태와 재생이 희미해질 정도로 ‘개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서울의 사방을 헤집을 대규모 개발 계획을 선보이며 서울 집값을 ‘미치게’ 만들고 있는 박원순은 분명 낯설다. 1·2기에서 했던 것처럼 ‘소프트웨어와 사람에 대한 투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에게는 능히 배반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족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게 여의도ㆍ용산 마스터플랜 추진을 보류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 기자

박원순은 3선 도전 출사표에서 1·2기 7년의 공적을 스스로 지목한 바 있다. 친환경 무상급식, 시립대 반값등록금, 채무 8조원 감축과 2배 늘어난 사회복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12만호 임대주택 공급, 재개발·뉴타운의 정리와 도시재생, 서울로7017과 보행친화도시 등이다. 개발이란 팻말을 붙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굵직한 개발 한방”이 없었어도, 뉴타운이나 청계천이 없었어도 박원순은 과반의 득표(52.8%)로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 됐다. 돌이켜보면 6·13 서울시장 선거는 개발과 집값이 쟁점이 되지 않은 최초의 선거였다. ‘박원순의 3선’은 개발·토건 대신 사람·재생·복지에 중심을 둔 서울시정에 대한 신임으로 매김해도 틀리지 않는다.

박원순의 표변이 그래서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다. 3선의 박원순은 극적인 방식으로 개발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도시행정의 노벨상’이라는 리콴유상을 수상하면서 여의도와 용산 통합개발을 발표하고, 삼양동 옥탑방살이를 끝내면서 취임 이래 최대 재정이 투입되는 ‘강북 플랜’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서울의 풍경을 바꿀, 10년 이상이 소요될 매머드 개발사업이다. 예고된 개발 프로젝트도 넘친다. 서울역 마스터플랜, 삼성동 현대차 신사옥과 대규모 마이스(MICE) 단지, 영동대로 지하공간 종합개발, 서부간선도로 지하화 등이 대기하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때 추진되었다가 ‘박원순 시장’이 뒤집었던 개발사업들도 들어 있다. 확실히 ‘개발’이 박원순 3기 시정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박원순은 옥탑방살이를 끝내면서 가진 ‘강북 개발 플랜’ 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여러분. 강남·북의 재산의 격차가 이렇게 큽니다. 집값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 불균형의 잣대를 재산 격차와 집값의 차이로 설정했으니 강남·북 균형개발은 결국 강북의 집값을 올리는 대책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집값의 격차를 줄여 강남·북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신기루다. ‘강북 개발’ 발표로 강북 변두리까지 집값이 상승하고 있지만, 강남·북의 집값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토건식 개발 처방으로 집값의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는 실패를 잉태한다. 박원순의 강남·북 균형발전 정책발표문에는 ‘세입자’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값 올리기가 목표가 되는 개발은 세입자 등 주거 약자들을 대상에서 배제한다. 이런 개발은 ‘사람이 행복한 서울’을 내세우는 박원순의 밑동을 흔들기 마련이다. 여의도·용산 통합개발에 대해 버티던 박원순이 끝내 “보류하겠다”며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자가당착 때문이다. 지금 서울의 집값은 ‘욕망의 정치’를 불붙인 2000년대 뉴타운 열풍을 연상시킨다. 한번 움튼 욕망의 정치는 쉬 사그라들지 않는다. 개발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 다시 타오른다. 불씨를 진화하려면 박원순의 개발 기조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박원순은 재선 출마선언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그럼에도 간혹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큰 프로젝트 하나 해야 하지 않냐는 말에 저 자신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토목과 외형에 기초한 수직적 랜드마크가 아니라 서울이 가진 자연, 역사, 사람의 가치가 어울린 수평적 랜드마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서울시장 재선, 3선을 목표할 때와 달리 이제 ‘큰 꿈’을 위해 수직적 랜드마크를 세우고 싶은 유혹은 더 강렬할 터이다. ‘박원순표’ 수직적 랜드마크를 세우려 야심차게 꺼낸 ‘용산·여의도 통개발’은 무너졌다. 박원순 ‘큰 꿈’의 허술한 밑천만 드러낸 꼴이다. 박원순 시장의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다는 2011년 시장 출마선언문을 인용하자. “이명박,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만든 서울은 천만 시민의 서울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권 꿈이 커가는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의 꿈과 희망은 오히려 축소되고 실종되었습니다.” 분명 박원순의 대권 꿈이 커갈 앞으로 4년에 대한 이만한 계언이 따로 없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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