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의당 심상정 대표(오른쪽)가 12일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된 배진교 당선인에게 꽃다발을 주며 축하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벌써부터, 정의당이 보이지 않는다. 의석 분포가 질적으로 달라진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의 정치적 존재감은 깃털처럼 가볍다. 진보정당의 공간은 2004년 원내 진출 이후 가장 협소하다. 더불어민주당은 독자적으로 패스트트랙이 가능한 절대 의석을 확보했고, 미래통합당은 야당 지위를 독점했다. 두 당의 의석을 더하면 전체 의석의 94%로 역대 최대치다. 20대 국회에서는 6석의 정의당이 법안 심의와 협상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성과를 낼 수도 있었지만, 21대 국회의 6석짜리 정의당에는 그럴 여지가 ‘전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6석의 성적표는 초라하지만, 21대 총선은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혹은 강제하는 ‘정초(定礎) 선거’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진보진영의 선거강령이 된 ‘민주대연합’의 폐기 속에서 치러진 첫 선거였기 때문이다. 애초 정의당에 ‘치명적’ 타격을 전제하는 민주당의 비례정당 창당은 ‘민주대연합’의 잔도를 불태운 것이다. 정의당의 비례정당 참여 거부는 퇴로가 봉쇄된 상황에서 나온 외통수 선택일 뿐이다. 고 노회찬 의원의 경남 창원성산 선거구에서 ‘미래통합당에 내줘도 좋지만 (정의당과) 단일화는 안 된다’는 민주당의 대응이 가리키는 바는 선명하다. ‘민주대연합’이란 한 시기가 끝났다. 민주당은 혼자서 보수세력(미래통합당)을 상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자, 미련 없이 진보정당과의 연합 고리를 끊었다. 지역구에서 단일화하고, 비례투표에서 ‘교차투표’를 통해 외연 확대를 꾀하는 지난 10년의 진보정당운동은 그리 허망하게 끝을 봤다.
‘연합을 통한 확장’에 매달려온 정의당에 돌연한 ‘홀로서기’ 상황은 재앙에 가까웠다. ‘민주당 2중대’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노선과 정체성에서도, 정책 메시지에서도, 진보 의제에서도 민주당과 질적 차이를 보여주지 못한 정의당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민주당이 ‘재난수당 70%’를 얘기할 때 100%를 주장하는 정도다. 한마디로 미래통합당을 심판하기 위해 민주당이 아닌 정의당에 투표해야 할 이유를 하나도 제공하지 못했다. 비례위성정당 변수가 개입된 비례대표는 차치하고라도, 지역구 선거에서 진전은커녕 오히려 후퇴한 결과가 말해준다. 253개 선거구 가운데 75곳밖에 후보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생환자는 1명(심상정)뿐이고, 정당득표율(9.67%)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도 5명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이념으로서 진보가 아닌) 진보의 ‘프레임’을 전유하고 싶어한다. 이번 총선에서 확인된 유권자 지형을 감안하면, 진보의 공간이 민주당 왼쪽에 들어서는 것을 극력 경계할 터이다. 미래통합당이 확 찌그러진 상황에서, 진짜 진보정당은 민주당의 보수성을 도드라지게 만들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민주당은 통합당 못지않게 진보정당(정의당)의 의석 확대를 싫어한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이번 총선과 마찬가지로 정의당과의 연대를 배제할 공산이 크다.
정의당은 6석과 함께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오랫동안 적응해온 정치행로와의 작별이 불가피하다. 민주당의 개혁에 보조를 맞추며 제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 실리도 챙기는 틈새정당으로 더는 생존하기 어렵다. 민주당의 ‘정의당 배제’ 전략으로 그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진보정당의 본령에 입각하는 ‘독자 노선’은 필연이다. 의회 내 입지는 좁아졌지만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희망의 근거도 확인했다. 정의당은 비례정당 참여 거부로 민주당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10%에 가까운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10명 중 1명, 진보 독자파 성향이 강한 순도 높은 지지층으로 볼 수 있다.
“집권여당의 개혁을 견인하겠다”(심상정 대표)는 식의 미망을 버리고, 이제 진보정당 본연의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불평등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고, 이들을 위한 정책을 추동하는 것이다. ‘진보적 대안’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의당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벼릴 것인가. 민주당 아류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너진 진보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 ‘진보야당’의 길을 가야 한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한 17대 국회에서 10석의 민주노동당은 ‘거대한 소수’의 힘을 보여줬다. 거리와 광장으로 나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에 기초함으로써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다. 정의당도 ‘6411번 버스’, 그 가난한 이들의 거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양권모 편집인>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그린뉴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0) | 2020.05.15 |
---|---|
[사설]이명박 정권 국정원의 공작으로 드러난 전교조 비합법화 (0) | 2020.05.14 |
[사설]국회 운영 발목 잡는 ‘상전 법사위’ 더 이상 안 된다 (0) | 2020.05.13 |
[이기수 칼럼]김대중·노무현에게 180석이 있었다면 (0) | 2020.05.12 |
[기고]‘코로나19’ 이후에 대한 정부 구상…‘경제’만 있고 ‘사회’가 없다 (0) | 202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