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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9단인 줄만 알았더니 정책 9단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정책적 과제는 손대지 않은 게 없더라”면서다. 2020년 5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문재인 정부 정책을 보면서 혹시나 노 전 대통령이 한 말이 있는지 찾아보면 “반드시 뭐가 있더라”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크고 작은 진보 정책을 설계했고, 그렇게 국정에 뿌려진 씨앗들이 보수정부 9년간 묻혔다가 다시 싹을 틔우고 살이 붙고 있다고 본 것일 테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 10월에야 겨우 첫발을 뗀 ‘매달 넷째주 토요휴무제’는 2년 뒤 노무현 정부에서 ‘주5일 근무·수업’으로 정착되고, 지금 ‘주52시간 근무제’로 한발 더 나아갔다. 세 고비 다 ‘시기상조’라는 저항이 있었다. 1999년 외환위기 속 시작된 국민기초생활제는 수급액을 올리며 사각지대를 좁혀가고 있고, 제주 4·3사건과 5·18민주화운동도 진상규명-명예회복과 보상-대통령 사과-국가기념일 제정의 긴 여정을 밟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복지정책 저작권은 현재의 국민연금·의약분업·건강보험 체계를 완성한 김대중 정부에, 대미정책의 변곡점은 용산기지 공원화·전작권 전환·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노무현 정부에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국가인권위와 여성부를 세상에 내놓았다면, 노무현 정부는 종부세·사학법(개방형이사제)·공공기관 지방이전의 발판을 놨다. 여소야대나 내분, 제왕적 야당 총재와 보수언론의 집요한 공격 속에서 임기 말까지 내디딘 정책들이다. 집권 4년차 김 전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0%, 한·미 FTA로 지지층 이반을 겪은 노 전 대통령은 23%일 때였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180석이 있었으면 무엇을 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한 달 전 4·15 총선에서 180석 거여(巨與)가 출현한 후 밥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김대중 청와대의 마지막 대변인이었던 박선숙 의원에게 물었다. 바로 교육이라는 말이 나왔다. “평준화 교육이 산업화 시대에 맞다면 지식정보시대엔 창의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다고 했다. 평준화·수월성 대치를 넘어 근본적인 교육 틀과 학벌 없는 사회를 짜고 싶은 ‘고졸 대통령’이었지만, 착수도 못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어록과 회고를 담은 책 <진보의 미래>와 <운명이다>엔 아프게 돌아본 두 가지가 나온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고, 제일 가슴 아파한 것은 노동의 유연화였다. 고삐 풀린 비정규직 사회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자책이었다.

바야흐로, 처음 가는 길이다. 집권 4년차 문을 여는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71%를 찍었다. 앞선 3년을 촛불로 출발했다면, 지금은 봉쇄 없이 코로나19 큰 불을 잡은 자부심·합심(合心)·경계심이 ‘전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받치는 3각 축이다. 3주 후 180석 거여는 21대 국회 모든 상임위에서 절대적 과반수를 점한다. 지방정부와 교육감, 사법 권력도 진보가 대세다. 아스팔트 태극기부대에 휩싸였던 제1야당의 황교안 체제는 끝났다. 어느 시간까지는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국민 눈을 무서워할 야당복(福)도 더해질 수 있다. 코로나와 총선이 리셋한 세상, 그 운전대를 진보가 잡았다. 무엇도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절대 권력이다.

거여의 버킷리스트는 달라질까. 총선 직후 사방에서 권고한 ‘겸손한 권력’은 조심조심 지지율 관리나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코로나19를 헤쳐가면서, 다시 국정 키를 쥔 진보의 역정에서 곱씹을 것은 ‘큰 개혁’이다. 연금보험, 공공임대주택, 최저임금, 79% 최고한계소득세…. 미국 사회보장제도 기틀이 만들어진 것은 90년 전의 대공황이다. 그 뉴딜 시책은 모두 100일 안에 나왔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삶의 위기에서 오고, 그 출구는 언제나 약자들의 힘겨운 삶에서 먼저 열린다. 

2020년의 대한민국도 다를 게 없다. 갈 길이 먼 전 국민 고용안전망, 넘어진 데서 또 넘어지는 재난안전망,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녹색 뉴딜, 또 절감한 공공의료, 백년지대계를 짤 국가교육위원회는 속도 있게 만들어가야 할 길이다. 버릴 것도 있다. 기업에 40조원을 부으면서 재난지원금 3조원 올리는 데 파르르 떠는 정부는 곤란하다. 국가와 기업만 빠져나오고 국민들은 피눈물 흘린 IMF 외환위기를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의 삶을, 예산 배분의 관행을,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게 사회·경제제도 개혁이다. 처음 가는 180석의 길, 진보의 미래도 거기에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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