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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을 다녀왔다. 누군가는 드라마 <셜록>의 배경인 런던 베이커가(街)를, 현대미술의 성지인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을 권했지만 정말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다. 술꾼인 내게는 펍(pub)이 그랬다. 매일 아침과 점심을 포만감 있게 챙겨 먹었는데, 그건 펍에서 맥주, 정확히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주조한 지역 수제 맥주(크래프트 비어)만 줄곧 마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5박6일 머무는 동안 런던과 옥스퍼드의 펍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락날락거렸다.

펍. 퍼블릭 하우스의 약자다. 서민과 여행자들의 술집이다. 예전 펍들은 숙박을 겸해 ‘여관(taver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도 많다. 단층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2층 이상일 경우 위층에서는 요리와 간단한 맥주 한두 종이나 와인을 내놓는다. 1층 바(bar)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맥주와 간단한 마른 안주만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푸짐한 안주에 술을 곁들이는 한국인의 술상에 비하면 단출하다. 펍은 오래됐다. 수백년 된 펍도 찾아볼 수 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사람들이 더 좋아하기에 새로 연 펍이라도 일부러 골동품을 진열한다고 한다. 펍은 캠퍼스 안이나 근처에도 있다. 대학생들은 런치 메뉴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강의실에 들어간다. 아이들도 낮에는 부모를 따라 펍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곤 한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람과 사귀는 법을 펍에서 배우는 셈이다. 펍에서는 밴드가 공연을 하기도 한다.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 산업도시의 펍은 노동자들이 정치를 논하고 행동을 약속하는 공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 펍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수줍고 무뚝뚝한 영국 사람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펍에는 ‘먹고, 마시고, 사교적으로(Eat, Drink, Social)’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처음 갔던 펍에서 놀란 건 초면에 그들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허풍, 빈말, 짓궂은 장난과 진지함이 교차했으나 수다는 내내 유쾌했다. 진짜 ‘스몰 토크’였다. 웨스트민스터 앞의 펍 바텐더는 내게 프로게이머 임요환을 아냐며, 플레이를 따라하는 데 쉽지 않다면서 와인 한 잔을 서비스로 줬다. 웨스트민스터 청소부 여성은 언제든 그곳을 구경시켜주겠단다(농담이었을 것이다). 런던 중심가 피카딜리 서커스의 펍에서는 아일랜드 남자가 내게 “어이, 친구”라 부르면서 다가와 자신들의 ‘펍 친구들’을 소개시켜줬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에 대해 실컷 토론하다가는, 각 나라의 건배 구호가 뭐냐고 묻는다. 술에 취한 한 남성은 내게 “백인들 얼굴 구분할 수 있냐”고 묻더니 “나는 동양인들을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다 똑같잖냐”면서 인종주의 발언을 뱉기 시작한다. 한 여성이 곧 위트 있게 핀잔을 준다. 남자는 “미안”을 외치고 군말을 안 한다. 다른 남성은 어색함을 넘길 유머를 건넨다. 이른바 사회적 음주(social drinking)의 공인 장소인 만큼 나름의 규칙이 공기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여행과 사교를 좋아하는 글로벌 청춘들은 그래서 영국을 찾아 ‘펍 투어’를 즐긴다.

물론 한국에도 ‘펍’은 많이 있다. 영국 에일 맥주와 아일랜드 기네스 흑맥주 맛을 알아버린 애주가들은 ‘크래프트 비어’가 써 있는 강남역, 신사, 합정, 이태원, 서촌, 북촌의 ‘펍’을 찾아간다. 그 ‘펍’들은 다양한 ‘보통 사람들’이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기보다는 세련된 입맛의 식도락들이 찾아가는 ‘맛집’이자, 칸막이가 쳐 있는 자리에서 친구, 지인과 취향을 공유하고 ‘인스타’ 사진을 찍는 공간에 가깝다. 펍에서 파는 술과 안주는 바다를 건너 넘어 왔지만, ‘펍 문화’는 함께 넘어오지 않은 셈이다.

실은 영국에서도 펍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중이다. 2000년대 중반 실내 금연이 큰 영향을 끼쳤단다. 주세가 올라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서 집에서 마시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한다. 일부 젊은이들은 나이든 느낌의 펍보다는 클럽이나 맛집을 선호하게 됐다. 15년간 런던의 펍 중 4분의 1이 문을 닫았고, 지금까지 30년간 사라진 펍이 전국적으로 3만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에도 한 주에 29개꼴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글로벌 여행자가 많은 런던을 벗어나면 펍의 풍경은 확실히 달랐다. 옥스퍼드 주택가 펍의 바에서는 노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바텐더와 객쩍은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 퍼즐을 풀고 있었다. 모처럼 말 걸 이방인을 발견한 칠순이 넘은 노인은 자신이 경험한 싱가포르와 홍콩의 풍경을 길게 풀어주었다. 젊은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혼자 맥주를 홀짝였다.

펍이 좋았던 이유는 맥주 때문만이거나, 영어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외려 언젠가부터 ‘잘 아는 사람’ 말고는, 누군가의 소개를 받거나 보증을 받지 않고서는 얼굴을 마주 보고 말을 섞는 것이 ‘위험해진’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식당 직원과도 대화하기를 꺼려 키오스크로 버튼을 눌러 음식을 ‘비대면 주문’하는 걸 편하게 느끼게 됐다.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이불 밖은 위험해”라며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로 하려는 세상, ‘비대면’이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친근한 표정과 유머를 통해 쉽사리 이방인에게 ‘친구’라며 다가오는 영국의 ‘펍’이라는 공간은, 낯설지만 반가운 ‘상상’을 불러낸다.

도시화의 진척,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확산, 개별화를 지향하는 개인주의 윤리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이다. 나 역시 사람과 대면하기보다 메신저 채팅이 편하고, 회식 자리보다는 친구 몇 명이 편하게 갖는 술자리가 좋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수다를 떨어본 경험의 부재, 회식을 하더라도 맥주 한 잔을 들고 다니면서 ‘스몰 토크’를 하고 간단히 즐겁게 헤어지는 경험을 갖지 못함 때문 아닌가 싶었다. ‘동네’가 살아있던 시대에서 자라 참견을 하고 오지랖을 떨던 세대가 사라지고 개인주의자들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좀 더 배려하며 수다를 떨고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펍이 아니라도 좋으니, 술집이 아니라도 좋으니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서로 불편하지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이 이곳저곳에 생기면 좋겠다 싶었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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