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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있을 때 면담하러 오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은 진로를 묻기보다, 책벌레 선생에게 책 이야기를 묻고, 연애 상담을 하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가곤 한다. 찾아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왜 남학생들은 배낭여행을 잘 가지 않을까?” 몇몇은 외국에 간단다.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번 돈과 용돈으로 방학이 끝날 무렵 삼삼오오 일본이나 중국을 갈 거라고 했다. 극소수지만 부모와 함께라면 여행거리는 좀 더 길어진다. 싱가포르나 호주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방학 하기 전까지 줄창 안 가본 나라에 꼭 가보라고 당부했지만, 개강 후 물으면 정작 해외에 나간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여학생들이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한 선배는 비행기에 탄 한국인은 죄다 노인들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국제화 물결을 타고 여행자유화가 시행되면서 배낭여행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청춘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로 여겨졌다. 특히 유럽 배낭여행이 그랬다. 10여년 전 대학 동기 중 적지 않은 숫자가 1~2학년 때 유럽으로 향하곤 했다. 그들은 로마와 파리, 런던으로 대표되는 로맨틱한 유럽 도시를 거닐며,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사진으로 찍어 담아오겠노라고 하면서 항공기표를 자랑하곤 했다. 여행을 마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로맨틱 유럽’ 이야기는 잠시, 대개 ‘고생담’만 한없이 풀어놓곤 했다. 함께한 친구와 싸워서 유럽 어느 도시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유스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못볼 꼴’을 보고, 동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 등등. 이야기는 “그래도 정말 좋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긴 했다. 스마트폰 없이 종이지도를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붙들고, 길을 물으려니 영어가 잘 안돼 손짓 발짓을 하면서 고생을 했어도 말이다.

젊은이들의 배낭여행 현황을 보려고 해외여행 통계를 뽑아봤다. 2006년 출국관광통계와 2016년 국민여행실태조사를 살펴봤다. 일단 40대 이상 해외여행객이 상대적으로 늘었다. 2006년에는 40대 이상의 비율이 48%가량이었는데, 2016년에는 57%로 늘었다. 특히 50~60대 관광객 비율이 증가했다. 고령화 사회와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볼 때 정말 도드라진 특징은 성별 여행 패턴이다. 20~30대가 가장 많이 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살펴봤다. 일단 20대 남성은 점점 해외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유럽 여행의 경우 2006년에는 여행자 중 60%가 여성, 40%가 남성이었는데 2016년에는 80% 대 20%로 격차가 늘어났다. 10년 전 30대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럽으로 나갔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유럽을 더 많이 간다. 아시아 관광에서는 65% 대 35%에서 60% 대 40%로 성별 격차가 줄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행 목적지가 성별에 따라 달랐다. 일본은 성별 상관 없이 많이 찾지만, 남성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찾을 때, 여성들은 홍콩이나 대만, 인도를 찾았다. 통계는 10년 사이 아시아를 벗어나지 않는 젊은 남성의 여행 성향과, 글로벌 세계를 누비는 젊은 여성의 여행 성향이 양극화되는 추세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가는 젊은이들의 성별이 확연히 갈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 기대라는 ‘압력’이 달라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이 입대 전이라 먼 곳 가기를 꺼리고, 제대하면 취업 준비 때문에, 취업하고 나면 결혼 준비 때문에 해외여행을 꺼린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꼭 그런지는 의문이다. 10년 전에 남성에게 주어졌던 경제적 압력이 지금에 비해 더 작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취업경쟁에서 특별히 여성이 훨씬 많이 승리했다는 증거와, 남성의 임금이 여성에 비해 특별히 떨어졌다는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외려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연애, 결혼 등에 대한 ‘압력’을 느낄 때 한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게 대응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젊은 여성들이 ‘압력’에서 비켜나, 좀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며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알려진 유럽을 다니면서 ‘대안’과 ‘해방감’을 찾는 동안, 남성들은 그 ‘압력’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해석을 그쳐서는 안된다. 젊은 여성들을 ‘무책임’하게 먼 나라 가서 소비나 하는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여성혐오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여행에 대한 성별 가치관 차이가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산업화 시기 경제가 만들어낸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다가 유럽 여행 가서 ‘무시’를 당했다는 한국 남성들의 ‘경험담’을 많이 발견했다. 큰맘 먹고 갔는데 ‘대접’받질 못하고 백인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는 식이다. 글의 아래에는 며칠간 동남아 여행을 가는 게 낫다는 댓글이 달린다. 자신이 디뎌본 ‘장소’보다는 자신의 ‘지위’에 대해 더 예민한 것이 한국 남성들이라는 문화연구자들의 연구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젊은 남성들을 백인들이 많은 나라로 더 많이 배낭여행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안에서 ‘소수자’가 되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세계 속에서 인종과 성별에 따라 어떤 시선들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산 경험이 무엇일까.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인식틀과 세계관이 다양한 경험에서 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스스럼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와 경관과 마주해 ‘나’와 ‘남’의 문제를 살피는 젊은 여성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과, 아시아를 잘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고려하는 젊은 남성의 감각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젊은 남성들의 독서와 문화 향유가 십수년 새 큰 폭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말이다. 어떤 남성과 여성을 한국 사회가 길러내고 요구하고 있는지 ‘여행 감수성’이라는 기준으로 반문해봐야 하지 않나. 물론 그런 차이로 누군가를 규탄한다고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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