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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배경은 뉴욕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된 소년에 대한 배심원 합의가 진행 중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끌어내서 그 결과를 판사에게 알려주면 된다. 배심원들은 유죄냐 아니냐만 결정할 수 있다.

판사는 만약 유죄 합의를 이끌어낼 경우 소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하겠다고 귀띔한다. 배심원들은 최종 합의를 이끌어낼 때까지 밀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첫 배심원 투표 결과는 무죄 1 대 유죄 11. 모든 배심원이 유죄를 생각하는 가운데 무죄라고 손을 든 배심원은 끊임없이 사건의 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을 주장한다. 어떤 배심원은 야구 보러 빨리 경기장에 가고 싶어 평결을 빨리 끝내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생떼를 쓰고 악만 지른다. 주인공은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 하고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처음의 대세를 뒤집고 무죄 12명으로 합의를 해낸다. 개개인들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의견을 내지만, 누군가는 대세가 기울기 때문에 편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내고 ‘합리적 의심’을 통해 합의를 해낸다. 영화는 우리의 통념들에 대해서 반문한다. “딱 보면 뻔하다”는 말 대신 미묘하게 어그러진 사실의 맥락과 조각들을 끊임없이 맞추려는 시도가 억울한 사형집행을 막아낸 것이다.

최근 특정인에 대한 ‘폭로’와 폭로에 뒤따르는 SNS상의 ‘공론화’, 공론화에 이은 ‘인신공격’이 유행병이 됐다. 지난달 건대입구역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에서 엄마와 같이 탑승했던 7살 어린이가 엄마 없이 먼저 내리고 버스가 떠나가버렸다. 엄마는 3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승객을 내릴 수 없었다는 원칙을 지켰다. 사건 직후 누리꾼 한 명이 본인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사건을 폭로한다. ‘공감한’ 누리꾼들은 사건을 SNS를 통해 ‘공론화’했고,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단죄’가 버스기사에게 쏟아졌다. “중년 남성 기사가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했다”는 호소가 진실을 덮었다. 적지 않은 미디어가 SNS와 폭로자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이른바 ‘팝콘 튀기기’를 했다.

사실관계가 파악된 직후 SNS와 언론 등에서 태세전환이 벌어졌다. 버스기사를 비난하던 분위기는 뒤바뀌어 아이 엄마를 ‘맘충’이라며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처음 폭로를 한 누리꾼은 사과를 약속했지만 곧 조용히 사라졌다. 버스기사와 아이 엄마의 가슴에만 멍이 들었다. 모두의 확신은 근거가 부족했지만 단정은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영화 <김광석> 개봉 후에 벌어지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가해자로 의심하는 서해순이 법의학자들의 판단처럼 무죄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책임을 묻고 사건을 정리할까?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고, 온전한 정보도 갖고 있기 어렵다. 영화 속 배심원들이 효율적인 다수결 투표가 아닌 지루한 만장일치 합의를 하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 토론하면서 불완전한 개인의 한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답답한 것은 어떤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실력이다. 시민들이 납득하는 공론을 만드는 기제가 미흡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함께 모여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합의해 해결해본 적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부터 ‘모둠 수업’은 합의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말한 대로 흘러간다.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무임승차’만을 비난할 뿐이다. 교육학자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을 “개성 있지만 무난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싸우면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보다는 “형(언니)이니까 양보하라”며 혹은 “동생은 형(언니) 말 듣는 거야” 하고 혼을 낸다. 직장의 회의에서도 결론이 정해지면 맞춰 따르는 데에 익숙하다. ‘송곳’ 같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대지 말라”는 경고를 듣거나, 경고를 무시하면 왕따를 당한다. 조정과 협상의 경험이 부족하고 절차는 겉돈다.

한국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선택지는 개인적 보복이 아닌 이상 두 가지다. 단체행동으로 몰아치거나,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소비자운동 등은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단체협상을 통해 엇갈리는 의견을 검토하며 문제를 푸는 과정을 가졌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흐름은 검증과 합의의 단계, 협상의 언어를 생략한다. 혹여 폭로 대상인 개인이 코너에 몰려 실언이라도 하면 실언은 ‘팩트’가 되어 온라인 공격의 빌미가 된다. 상황의 맥락, 당사자의 처지 등 현실의 미묘함은 해석 대상에서 제외된다. 개인들은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명예훼손과 무고죄 등의 법적 구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에 기댄 공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교실에서 왕따 주동자를 찾아 처벌하는 것처럼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공론화’라는 단어는 공론을 모아내는 것보다 온라인 부족들이 특정 목표물을 폭격하자는 신호이기 일쑤다. 무리의 확증편향이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화의 대의가 옳다 한들 이는 문제해결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판단을 정지한 채, 영화 속 배심원들처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충분히 의견을 교류하고 합의해야 ‘공론’이 안착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토론회처럼 이해당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교류해야 합의를 만들어낼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 내용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지식인까지 나서 온라인의 ‘단죄’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단편적인 판단으로 기름을 끼얹으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시민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공론을 모으는 합의의 경험이 누적된 게 민주주의 사회의 실력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는 의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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