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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백종원의 푸드트럭> 그리고 지난주에 다시 시작한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열심히 보는 중이다. 요식업 사업가이자 요리 전문가인 백종원이 창업하려는 청년이나, 식당을 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방송이다. <푸드트럭>이 소자본으로 창업하려는 청년층을 타깃으로 삼았다면, <골목식당>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쇠락한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가게들을 찾는다.

두 가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먼저 <푸드트럭>에서 ‘안 좋은 의미’에서 화제가 된 청년 출연자의 표정이다. 푸드트럭에서 팔려고 내놓은 메뉴와 그 식재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중언부언하고 변명하다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결국 참지 못해 화를 내버리고 마는 백종원의 표정과 함께 공유됐다. 방송 이후 청년의 태도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비난받기 딱 좋은 모습으로 TV에 출연한 셈이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잘 대응하고,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유재석 같은 태도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악마의 편집’은 그런 모습을 극적으로 집어냈다.

출처: 백종원의 골목식당 홈페이지

두 번째는 지난주 <골목식당>에 등장한 백반집 주인 여성의 표정이다. 그녀는 식당의 메뉴가 백종원의 ‘레시피’를 다 따라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주변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라며 손님의 평가에 기대 자랑한다. 백종원이 맛과 위생을 지적하자, 그녀는 자신이 식당을 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거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남편은 눈물을 훔친다. 사회자와 제작진은 부부를 달래며 가게를 살리려고 한 이야기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위로한다. 방송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찬란했던 90년대 이대 상권’과 함께 블로그 등에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 이야기로 묘사되었다.

<푸드트럭>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패감이 누적되고 위축된 청년들의 표정이 연상됐다. 경직되어 있고 제대로 된 말로 대응하지 못하고, 언제든 터질 것 같은 표정. 자신이 못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억지로 둘러대서라도 방어하기 일쑤였다. 칭찬을 듣기보다 혼나고 지적받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특별히 입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거나 적성과 특기를 고려해서 진로를 잡지 못한 채, 지방대를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겠다고 시도하다 실패만 누적된 많은 청년들이 있다. 10대 어느 순간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잠을 청했던 숱한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듦’을 잘 들어주며 ‘희망’을 설계해줄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 대개의 평범한 한국 부모는 그저 “뭐든 하고 싶은 거를 해” 정도의 독려만 해줄 뿐 ‘전략적’으로 어떤 ‘선택지’를 제시하진 않는다.

공부 대신 10대 때부터 다양한 알바를 하며 온갖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한 교사의 말을 존중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다 총력 입시체제에서 뒤처지고,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방침 속에서 그들은 붕 뜨고 20대가 되는 셈이다. 실업계나 전문대를 나와 사무보조, 정규직 생산직으로 대표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로 들어가기 어려워진 시대와 궤를 함께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숙련노동에 대해 ‘조무사’라고 조롱하거나, 비정규직들에게 정규직 전환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대못을 박는 멸시까지 넘쳐난다.

그런데 <골목식당>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버틴 이유”가 떠올랐다. 백반집을 하는 여성은 경제성장기를 겪은 ‘건강한’ 세대, 평범한 사람들의 익숙한 천연덕스러움을 갖고 있었다. ‘국제시장’의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처신일 것이다.

50~60대 내 부모님 세대에게 늘 듣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대개 농촌사회에서 태어났고 다양한 공동체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도시에 살아도 쌀과 간단한 채소라도 부쳐주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보통은 여성이) 희생하여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고향 사람’이라는 다소 옅거나 짙은 관계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갖지 않고 소소한 장사를 하더라도 상부상조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친척이든 동네사람들이든 모아서 계를 활용했고, 은행 융자가 안되는 등 ‘사정’이 어려우면 이야기를 해서 곗돈을 당겨 받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잘못을 했을 때도 적어도 울타리 안에선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빌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배신도 당하지만 은혜도 입고 답례도 하면서 관계들을 유지하거나 키워갔다.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관계’ 바깥에서 살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왔어도 사람의 감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이런저런 ‘비빌 언덕’에 서로 의존하며 그 나름대로 ‘버텨온’ 것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아도 사회성 측면에서는 농경사회에서 익힌 관계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안정적인 삶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별일없이 사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국가는 물론 좀 더 넓은 그물을 쳐서 폭넓고 효과적인 직업교육을 유도하고,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써야 할 게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두가 탁월해져야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탁월함을 뽐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청년’들도 ‘스스로의 서열’을 매기며 위축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좋은 ‘어른’과 ‘친구’의 중요성을 곱씹게 된다. TV 프로그램을 찾아 조언까지 구해야 하나. 스스럼없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가까이에 있는 어른.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논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할 수 있는 친구 사이. 대가족과 마을 대신 핵가족과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사회성과 풍부한 표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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