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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폐쇄된다는 소리가 돌았다. GM 본사 신차 물량 배정에서 군산공장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최근 가동률이 20% 남짓했다는 말에 앞으로도 선전이 힘들겠다 싶었다. 생산라인 중 80%가 섰다는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했다. 군산 사람들의 설연휴가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기사를 읽다가 괜히 댓글창을 열어 봤다. 추천수가 많은 댓글들은 모조리 날이 서 있었다. 가장 많은 댓글은 “귀족노조 지원 결사 반대” “혈세지원은 국민투표로 하자”였다. 댓글을 넘기려니 숨이 가빴다.

이제 한국에서 더 이상 수출대기업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얻기 힘들 것 같다. 1987년 즈음 전국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역사는 힘이 없다. ‘알바노조’의 도움도 받기 힘든 청춘들에게는, 그들의 이야기는 스마트폰 게임 ‘듀랑고’에 나오는 ‘야생의 땅’보다 더 아득한 세계의 소리가 됐다. 

중소기업들은 많은 경우 하청업체다. 하청업체에 대한 대기업의 노무관리는 1987년보다 수천배 꼼꼼해졌다. 생산직이 무(無)정규직인 작업장도 있다. 편의점과 맥도날드 알바를 하면서도 9급 공무원 시험 도전을 선택한 청년들에게 정서적 공감을 하길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모진 공장 일이어도 상관 없다. 안정성의 소유 여부에서 이미 ‘성 안 귀족’과 ‘성 밖 농노’로 나뉨을 느낀다.

또한 부실기업에 KDB산업은행이나 정부가 직접 개입해 공적자금을 지원하고 경영상태를 호전시켜 매각시킨다는 말도 쉽게 쓸 수 없겠구나 싶다. 산업은행은 유상증자와 출자전환을 통해 주식까지 확보해 대우건설, 금호타이어 등 숱한 대기업을 거느린 대기업집단이 됐다. 빚을 악착같이 받아내야 하는 채권자의 입장과, 아까운 회사 회생시켜 주식의 가치를 키워 좋은 평가를 받아내려는 주주의 입장 사이에는 분명한 이해상충이 있다. 빠르게 회생시켜 매각하겠다는 말은 객쩍은 소리가 됐다. 아무 결과도 안 나오는 산업은행 구조조정의 십수년을 봤기 때문이다.

더불어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의 경제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의 동정을 받기가 어렵겠다 싶다. 대기업과 거기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있고 다 합하니 노동자 수십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말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지만, 그 지역에 살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이 체감은 되지 않는다. 경제활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서 출퇴근을 한다. 지방근무를 잠시 했던 사람들은 빠른 복귀를 다행이라 여기고, 오래 지방근무를 한 사람들은 수도권 사람들의 정서가 낯설 따름이다. 제주도나 거제도만 섬이 아니라, 수도권 바깥은 모조리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힘든 섬이 되어버렸다.

지역산업의 위기 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 같다. 보호무역 강화나 유가의 변화 등 경기 변화에 따라, 경쟁력의 한계에 따라 수출입국 대표선수 대기업들은 앞으로도 휘청거릴 확률이 낮지 않다. 지역은 도움을 요청하고, 정부가 공적자원 지원을 약속하고, 구조조정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고, 환멸이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사이 하청업체 비정규직이 우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공산이 크다. 그들이 떠나는 순간 지역경제는 위축되고 인구가 줄기 시작한다. 전 세계의 많은 산업도시가 겪은 일이다.

이미 한국의 제조업이 대량의 완성품을 만드는 공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았다. 가격은 가치와 비용으로 계산된다. 기업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가치를 높여서 애플처럼 팔든지, ‘추격형 성장’ 모델처럼 동급의 상품을 싸게 만들어 팔아야 한다. 비용 측면에서 보면 혁신은 원자재를 싸게 사든지, 내부 소재·부품·장치값을 줄이든지, 생산설비 기계화·자동화로 조립단가를 줄이든지, 인건비를 낮춰야 한다.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3~5%가 되지 않는 이윤을 주면서 운영한 것은 이미 20년째 굳어진 구조다. 수출대기업을 운영하던 회사들이 면세점에 진출하거나 내수 시장의 프랜차이즈로 진출해 재래시장과 자영업을 괴롭히게 된 것 이면에는 수출 제조대기업 경쟁력의 한계가 숨어 있다. 분명 공정위는 철저히 대기업의 갑질과 프랜차이즈 규제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는 ‘산업정책’이 있어야만 한다.

산업정책의 역할은 산업은행의 기조처럼 ‘좋은 회사이니 회생시켜 때 되면 좋은 값에 판다’는 것일 수 없다. 하청업체 쥐어짜고 사내하청 써도 이윤이 안 남으면 그런 대기업은 문을 닫는 게 정상이다. 불가피하면 통폐합하거나 정리하고, 하청을 맡던 중소기업들이 기술 개발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 글로벌 시장에 자리매김하게끔 돕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실 하청업체들도 한때는 판교의 엔지니어들처럼 혁신으로 도전하겠다는 젊은 사업가들이 세운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하청업체가 혁신하면 딱 그만큼의 성과를 대기업은 더 가져갔을 뿐이다.

노동정책은 망하게 생긴 회사의 노동자들이 실업 때문에 의욕을 잃지 않고, 프랜차이즈 사기를 당하거나 준비도 안된 채 자영업 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얼른 가진 기술로 작지만 견실한 회사에 취업해 자기 기술에 걸맞은 임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들이 연공서열제 대신 직무급을 받는 방식으로 임금체계를 재편하고, 새로 통상임금에 편입된 금액의 일정 부분을 연대기금으로 내놓아 중소기업과의 임금격차를 시간을 정해 줄여나가는 것도 따져볼 만하다. 안정적인 직장보다 안정적인 사회가 우선이다.

사실 산업화 시대를 지나서도 승승장구한 수출대기업의 성과도 운에 기댄 것이 많았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같이 말이다. 그러나 성장기에 정비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하지 않아 저성장기에 제조업의 성장 한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명한 기준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지역경제와 노동자들을 보전할 체계도 정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지방정부도 대기업 지키기를 넘어설 수 있다.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돈만 있다면 쉽지만 미래가치로 보면 비싼 일이다. 대신 체계를 만들고 분명한 기준을 잡는 일은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값진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정책에선 관성의 힘만 느껴지니 답답할 따름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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