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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 못난 구석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무서운 부끄럽고 못된 생각들이 마음속에 한가득이다. 당연하게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저지르지 않기 위해 만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럼에도 가끔씩 삐져나오는 못남을 모두 다 막아낼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내 곁을 떠났고, 누군가는 그 못남까지도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그들의 관대함으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못남과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것이 나만의 사정은 아닐 터다. 어쩌면 고결하다고 칭송받는 이들도 마음속에서는 자신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자기합리화의 유혹은 본능적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고, 그러니 어찌 그 가련한 존재의 사정을 봐주고 싶지 않겠는가. 작은 게으름에서부터 거대한 실수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 한다. 만약 자기의 명백한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동정과 용서의 대상이지 비난과 처벌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억울함이 더해지면 ‘나’는 순식간에 강철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존재가 된다. 억울함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제1의 정서다. 물론 이유야 많다. 당장 매주 토요일 칼바람을 맞고 길거리에 서있어야 하는 일 자체가 억울하다. 잘못한 이들은 따로 있는데 수습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피해자들이다.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억울함은 위험한 감정이다. 억울함이 나를 사로잡고 나면, 내 허물들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것이 정당화되고, 나의 잘못과 앞으로 저지를 잘못까지도 면죄부가 주어진다. 밝혀지는 모든 진실의 가치는 나의 오류 없음을 증명하는 것에만 쓰이게 된다. 그 억울함이 세상에서 가장 정당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잡아먹히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협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종종 한국사회가 억울함의 경기장처럼 느껴지곤 한다.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고 있다. 정당한 억울함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도움을 바라는 것을 무어라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억울함을 경쟁하는 것이다. 조금만 살펴보면 나보다 더 억울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경쟁은 그런 객관적이고 공정한 경쟁이 아니고, 무질서한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연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도 내 억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빼앗는 약탈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비난과 책임을 돌리며, 그중에서도 약자들을 기꺼이 짓밟는 비열함이 우리들의 억울함 속에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다.

대체 누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차별의 해소는 고사하고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욕설과 조롱으로 일관하는 남성들이 그렇다. 누군가의 특권을 소리 높여 성토하지만, 내가 가진 특권과 욕망은 되돌아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다. 자신이 대의를 위한다는 사실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목소리를 분열의 음모라며 의심하는 이들이 그렇다. 내가 받은 작은 피해에 온 힘을 다해 분노하면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한없이 무딘 사람들이 그렇다. 이것이 절대로 내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뻔뻔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당신과 내가 바로 그렇다.

민주주의자로서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공동체를 갖게 될 것이다.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편협한 개자식”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될 때, 싸워야 할 악마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가장 약한 자들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들의 억울함은 마침내 해소될 것이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은 억울함 너머에 있다.

최태섭 | 문화비평가·‘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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