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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의 역사는 길다. 1930년 11월22일자 동아일보는 굴뚝에 올라 농성을 벌이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일본 가와사키에 있는 후지방직 공장 파업 투쟁을 벌이던 다나베 기요라는 노동자가 80여m 굴뚝에 올라가 농성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5일간 굴뚝 농성을 이끌어간 이 노동자는 ‘연돌남(煙突男)’으로 불리며 당시 일본과 조선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불렀다고 한다.

파인텍 해고 노동자들이 노사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75m 높이의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지 일 년이 되었다. 해고노동자 홍기탁(왼쪽)·박준호씨가 12일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정지윤 기자

이듬해 5월29일 평양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있었다. 경찰이 파업 중인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 30여명을 해산시키자 강주룡이라는 노동자가 12m 높이의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갔다. 당시 30세의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에서 무산자 단결을 외치고 고용주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경찰에 9시간 만에 붙잡혔다. 당시 언론은 강주룡을 ‘을밀대 체공녀(滯空女)’라고 불렀다. 그는 경찰에서 취조를 거부한 채 76시간이나 단식 투쟁을 벌였으며 석방된 뒤에도 파업단을 찾아가 격려했다고 한다. 을밀대 농성은 한국 고공농성 투쟁의 시초로 기록되고 있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이 퇴조하면서 연돌남과 체공녀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노동탄압이 심해지면서 고공농성이 부활했다.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크레인 투쟁을 시작으로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굴뚝 농성 등이 이어졌다. 공권력의 무력진압으로 용산 철거민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고공농성은 목숨을 담보한 극한 투쟁이다. 고공농성자들은 하나같이 “땅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벼랑 끝 투쟁이다. 

서울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농성 중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의 박준호·홍기탁 조합원이 12일로 농성 1년을 맞았다. 이들은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가 노조와 약속한 공장 정상화와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75m 굴뚝 위에서 힘겨운 투쟁을 해왔다. 그러나 스타플렉스는 경영난을 들어 노사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노동권 존중을 약속한 정부도 중재에 나서지 않고 있다. 모두의 외면 속에 영세 기업의 노동자들이 차가운 허공에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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