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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일상을 대중적으로 표현한 작가 노먼 록웰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1943).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깔딱고개를 오를 때다. 1941년 1월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우리가 다져나갈 미래는 네 가지의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자유에 기초를 둔 세계”라며 언론(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했다. 30번이나 국민들과 노변정담(爐邊情談)을 한 루스벨트 생애에서도 손꼽히는 명연설이다. 세번째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는 빈곤층·실업자의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보듬자는 것이다. 그 말을 3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초선들에게 옮겼다. 김 위원장은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한다”며 “이 실질적인 자유를 당이 어떻게 구현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대공황과 코로나19의 공명(共鳴)일까. 뉴딜(New Deal)도 그랬고, ‘루스벨트 소환’이 이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의 표현은 그간 빈곤과 불평등에 주목한 진보학자들이 써온 말이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의 석학 아마르티아 센(하버드대 교수)이 확장시켰다.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고 한 그는 빈곤을 ‘자유가 박탈된 조건’으로 보고, 어떤 경제위기가 닥쳐도 빈자들이 굶어죽지 않고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질적 자유’란 말도 기본소득 주창자인 필립 판 파레이스(벨기에 루뱅대 교수)가 저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에서 쓴 개념이다. 파레이스는 2018년 경향포럼 패널로 서울을 찾아 “모든 이가 어떤 사회적 활동도 선택할 수 있는 지지대가 기본소득”이라고 말했다. 빈자가 말하는 자유는 불평등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한국 보수엔 낯선 ‘자유’ 개념이다. 

김 위원장은 통합당 의원들에게 “과거 가치관과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시비를 너무 걸지 마라”며 ‘약자와의 동행’을 되뇌고 있다. 김 위원장은 “재정 문제를 따져보겠다”며 신중한 자세지만, 당에선 기본소득 얘기도 움트고 있다. 총선 참패 후 제1야당의 새 방향을 큰 정부(복지·재정 확대)로 잡은 셈이다. 그 길은 언젠가 보수 내 작은 정부(시장주의) 목소리와 부딪칠 것이다. 넘느냐, 막히느냐, 돌아가느냐. 그의 리더십도, 한국의 보수도 거기서 첫 고비를 맞을 듯싶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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