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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전 사라진 20대 국회를 소환한다. 부질없이 네 살 더 먹은 ‘1987년 헌법’ 얘기를 짚고 싶어서다. 1만5002개 법안이 자동 폐기된 20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엔 마지막까지 2개의 헌법개정안도 올라 있었다. 하나는 2018년 야당이 불참해 투표불성립 처리된 문재인 대통령 개헌안이고, 또 하나는 지난 3월 여야 의원 148명이 발의한 뒤 본회의 상정이 무산된 국민발안제 원포인트 개헌안이다. 1987년 9차 개헌 후 국회에 처음 발의된 두 개헌안은 표결도 없이 생명을 다했다.

대한민국에 ‘개헌 불발의 방정식’이 길어지고 있다. 정권 초엔 국정 기틀을 다진다고 접고, 임기 끝엔 대통령 말에 힘이 없어 밀린다. 전국 단위 선거에 부쳐 처리하자는 개헌 국민투표 아이디어는 매번 유불리를 따지다 막혔다. 혼군(昏君) 탄핵 후 치른 2017년 대선에선 처음으로 5명의 주자가 2018년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안을 묻자고 한목소리까지 냈었다. 지금은 개헌의 ‘ㄱ’자만 나와도 보수 쪽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하고 나쁜 일 꾸미는 것처럼 공격한다.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언제 하자는 건지도 없다. 말은 가볍고 피로만 쌓여 있는 게 오늘까지의 개헌사이다.

헌법을 곧잘 그릇이나 집에 비유한다. 좁고 낡았다는 뜻이다. 1987년 마지막으로 헌법조문 37%를 바꾼 뒤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떠올려보면 금세 안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19대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생명권 조항이 헌법에 없음을 일깨웠다. 존엄사와 낙태가 인정받는 세상도 헌법은 백지고, 산업재해가 터지거나 자율주행차 사고 알고리즘을 놓고 사망자를 줄일지 부상자를 줄일지 옥신각신할 때도 생명 규정이 없는 헌법의 출발선은 모호하다. 

4·19혁명에서 끊어진 헌법 전문의 민주화 역사는 헌법이 오래 서 있었다는 징표일 뿐이다. 33년 전의 헌법은 모성 보호만 적시해 아빠가 육아휴가를 쓰는 그림이 없다. 헌법의 주어가 ‘국민’이다보니 국내에 사는 200만 외국인은 헌법재판소가 국민으로 인정했고, 장애는 ‘신체장애’만 적시됐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노동이나 비정규직·반려동물·기후위기·기본소득·교육불평등도 그 시절의 헌법은 모르거나 간과했다. 불로소득을 제어할 수 있는 토지 공개념도 헌법엔 근거 조항만 있다. 헌법재판관의 해석과 판정에 따라 헌법은 그때그때 땜질돼 왔을 뿐이다.

1949년 제정 후 지난해까지 64차례 고친 독일 헌법을 굳이 끌어올 것도 없다. 33살 우리 헌법에 쌓인 세월의 더께와 오차는 한국 사회도 모를 리 없다. 개헌도 이제 ‘왜’가 아니라, ‘어떻게’와 ‘언제’가 남은 것일 테다. 코로나19 극복이 만사지상(萬事之上)임을 전제하면, 온 세상을 빨아들이는 개헌의 적기는 가까이 두 번 보인다. 코로나19가 가라앉으면 대선까지는 먼 올해 말~내년 초, 2022년 3월 대선 후 총선이 1년쯤 남은 2023년 전반기다. 대작업인 개헌도 나눠서 해볼 만하다. 여야 논의가 쌓여 있는 분권형 개헌을 먼저 하고, 정교하게 설계하고 합의할 게 많은 기본권은 2023년으로 넘기면 어떨까. ‘제왕적 권력’을 나누는 개헌엔 대통령 4년 중(연)임제, 책임총리제, 지방분권, 감사원 독립, 유신헌법 잔재인 대법원장의 대법관 추천권이 다뤄질 수 있다. 대통령 임기가 4년으로 바뀌면, 2026년부터 대선·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지고 2년 터울로 총선은 중간 평가의 장이 될 수 있다. 그 장정을 따로 준비할 개헌특위 설치는 21대 국회에서 빠를수록 좋다.

한국의 9차례 개헌엔 쿠데타·독재의 아픔과 시민혁명의 격변이 서려 있다. 유일하게 국민투표까지 거친 1987년 헌법도 ‘정치엘리트 협상’ 틀은 넘지 못했다. 더 큰 시민계약을 맺을 때가 된 것이다. 21대 국회의 개헌 우호 세력은 역대급인 193석이다. 개헌특위를 하자고 한 ‘안철수당’ 3석을 합친 숫자다. 103석 제1야당이 개헌저지선을 달라 했지만, 그 속엔 개헌 반대·견제·지지파가 섞여 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노태우 청와대에서 경제수석을 맡을 때 토지 공개념 확대를 전제하고, 누가 뒷다리를 걸어오면 대통령이 막아달라고 했던 사람이다. 어느 때보다 대타협의 토대는 높아지고 어떤 합의를 도출할지가 관건인 셈이다. 헌법엔 시대를 넘는 일관성과 사회 변화를 담아내는 유연성이 함께 흘러야 한다. 헌법은 한 시대만의 것도 아니고, 갈등을 드러내고 해법을 찾는 개헌의 목표는 사회통합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시민사회가 낡은 헌법을 안팎에서 쪼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지혜도 절실해졌다. 그 운명과 봇짐을 오롯이 진 21번째 국회가 막 시작됐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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