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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파 일각의 4·15 총선 불복이 계속되고 있다. 격렬한 경기가 끝난 뒤 판정 시비가 이는 것처럼, 치열한 선거전 뒤에 후폭풍이 생길 수는 있다. 선거부정론이 제기된 것이 처음도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 노무현에게 졌을 때 한나라당은 전자개표 조작설을 제기하며 당선무효소송과 함께 재검표를 요구했다. 법원은 전국 80여개 구·시·군에서 재검표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물으나 마나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 불복은 과거와 다르다. 의혹 제기 양상이 사뭇 거친 데다 시민들의 주목도도 전과 다르다. 흡사 폐기된 천동설의 신봉자들이 사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것 같다. 무시가 능사가 아니다.

그동안 제기된 선거부정론을 보면 그 메커니즘이 비슷하다. 처음에는 사소한 주장에서 출발하지만 멀쩡한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파급력이 커진다. 이번에 민경욱, 공병호가 가세하면서 판이 커졌듯 2002년에는 당내 율사 의원들이 뒤에서 부채질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퍼나르는 미디어가 등장한다. 과거 김어준 등 ‘나꼼수’가 선관위의 부정 의혹을 제기했을 때는 팟캐스트가 도구로 이용됐다. 지금은 유튜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외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주장이 부정의 근거로 제시되는 상황도 비슷하다. 이번 의혹 제기에서는 독일 헌재의 2009년 판결이 등장했다. 한 보수 칼럼니스트는 이를 “컴퓨터로 진행된 투·개표는 위헌이다. 일반 시민이 전 선거과정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결”이라고 요약 전달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전자 기능을 가미한 투표까지 모두 부정한 게 아니다. 시민이 검증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 전자적 투표를 실시하라는 뜻이다. 

‘지구평면설’로 좀비처럼 되살아난 천동설은 그 신봉자가 미국인 전체의 2%쯤 된다. 이들은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으로 지구가 구체임이 증명됐는데도 믿지 않는다. 이를 포토샵의 결과라고 우긴다. 또 어떤 실험도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미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한 것도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자기들이 믿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난주 중앙선관위가 선거부정 의혹을 반박하는 시연회를 열 때도 ‘천동설의 좀비’들은 해명을 믿지 않았다. 투표지분류기를 다 분해해 보이며 통신장치가 없기 때문에 해킹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그것은 선관위의 일방적인 설명일 뿐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좀비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천동설 좀비들 뒤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동설 신봉자들과 공생하며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투표소에서 자신의 서명 없이 투표함이 바뀌었다고 주장했던 참관인은 결국 유튜버의 회유에 빠져 허위 진술했다고 실토했다. 경기 구리시에서 투표용지를 훔쳐낸 사람도 유튜브 운영자와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공병호 TV나 신의한수, 가로세로연구소 등은 이 순간에도 부정선거 의혹을 지속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조회수가 많을수록 돈을 버는 이들 유튜버들에게는 진실보다 자극성 강한 정보가 더 급하다. 보수언론의 유명 칼럼니스트들도 천동설의 좀비들 주장에 가세했다. 노골적으로 천동설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선관위가 심판으로서 신뢰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근거가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문재인 정권과 선관위를 싸잡아 비난하려는 목적을 위해 천동설의 신봉자들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천동설이 오류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방조·동조하고 있다.

모든 시민이 지동설을 넘어 상대성이론이나 초끈이론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상식은 따라야 한다. 4·15 선거를 두고 제기된 부정 의혹은 120여건에 이른다. 이는 선관위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게 아니다. 시민을 요설로 현혹시키며 과학적 사고를 흔든다. 이미 차세대 투표방식으로 거론되던 전자투표는 어려워졌다. 블록체인 기술과 함께 당연히 도입될 것으로 믿었지만 이번 문제 제기로 당분간 도입이 어렵게 됐다.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천동설에 대응하게 된 것도 이들의 요설로 과학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축소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동설 좀비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민경욱에게 투표용지를 건넸다는 사람은 투표용지 반출이 죄가 되는 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투표용지 절취 행위는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이다.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게 민주주의이다.

<이중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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