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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정명(正名)”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군자는 명칭을 바로잡아야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은 정치뿐 아니라 모든 일의 시작이다. 시인 김춘수는 꽃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된다고 했지만, 정명으로 정체성을 갖는 게 어찌 꽃뿐일까.

우리 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만큼 ‘정명 논란’이 지속됐던 사건은 드물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20일 포고문에서 “의로운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났다”며 봉기를 ‘의거’로 자처했다. 그러나 지배층은 동비(東匪)의 난으로 보았다. 지식인들도 비슷해서 당시 세태에 비판적이었던 매천 황현조차 동학도를 줄곧 ‘동비’나 ‘도적’으로 기술했다.(<매천야록>) 이후 남한에서는 ‘동학(당)의 난’으로,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주로 써왔다.

1960년대 들어 동학란 대신 ‘동학혁명’ 명칭이 등장했다. 시인 신동엽은 <금강>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깃발/ 높이 나부끼며/ 고부 군청을 향해 진격했다”고 썼다. 4월혁명의 여파다. 박정희 정권도 ‘동학혁명’으로 명명했다.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해 동학혁명에 접맥시키려는 심산이었다. 황토현전적비와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진 것도 그때였다. 80년대 이후에는 동학혁명 이외에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다. 농민군의 조직, 종교의 역할, 사건 전개와 평가를 놓고 시각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정명’과 함께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국민성금으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 전봉준 동상을 세웠다. 정부는 내년부터 매년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기린다. 이날은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 날이다. 120여년 전 농민들의 의거가 ‘동학농민혁명’이란 이름을 얻고 국가기념일로까지 제정되면서 역사에서 평가를 받게 됐다. 이제 봉기 참여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농민혁명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만 남았다. ‘정명’이 됐으니 그에 걸맞은 ‘실행’이 따라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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