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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에 택시를 타야 했다. 마침 택시 정류장에 택시 한 대가 들어와 섰다. 얼른 올라타면서 죄송하지만, 좀 먼 곳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30년 가까이 택시 승객으로 살면서 눈치껏 터득한 요령이었다. 기사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공손하라! 그런데도 퇴근 시간에 시외 장거리 운전을 마뜩잖게 여길 거라 생각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택시 승차 거부야 이골이 났으니까. 그런데 젊은 기사는 순순히 미터기를 켜면서 차가 많이 막힐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대화에 적절하게 응대하며 안전 운전에 기여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는 조용했다. 그가 입을 뗀 것은 외곽순환도로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미터기를 끈 뒤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10분 정도 돌아야 해서 미터기를 끄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10일 오후 2시께 서울 여의도 국회경비대 앞 국회대로에서 택시기사 최 모 씨가 자신의 택시 안에서 몸에 인화 물질을 뿌리고 불을 질러 분신을 시도했다. 영등포경찰서 과학수사대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경찰서로 견인된 최 씨의 택시를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낯설었다. 스스로 미터기를 끄는 이는 처음이었다. 10분 정도면 괜찮다고 해도 그는 그때부터 도착지까지 미터기를 꺼놓은 채 달렸다. 내가 가야 하는 도서관은 좁은 골목을 헤집고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그는 묵묵히 길을 찾아갔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도서관 정문 표지판 앞에 차를 세우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늦어 죄송합니다. 초행길이신데, 저기 안내도를 보고 건물을 찾아가시면 될 것 같네요.”

나는 그의 친절함에 울컥했다. 빈 차로 먼 길을 되돌아갈 그가 걱정되어서 요금을 더 얹어줬다. 그날 약속한 시각에 조금 늦긴 했어도 괜찮았다. 돌이켜 보면 택시를 타면서 고약한 일도 많았지만, 낯선 길을 잘 찾아주고, 짐을 들어 옮겨주고, 같이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하면서 좋았던 이들이 더 많았다.

카풀 앱을 반대하는 택시 업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관련 기사에는 택시의 불친절을 개탄하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린다. 공감도 되지만, 그렇다고 생존권을 내건 이들의 간절함을 외면해선 안된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하면서 누구든 벼랑 끝에 세워질 수 있다. 그게 곧 나일 수도 있다. 그때 다른 이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너는 그동안 잘했니? 친절했니?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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