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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보수의 ‘자살’

opinionX 2018. 7. 12. 15:01

2007년 대선에 이어 2008년 총선에서 참패를 당해 존망의 기로에 처했던 통합민주당 의원들이 영국 보수당을 찾아갔다.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밀려 위기에 빠졌던 보수당이 혁신과 노선 전환을 통해 집권의 길을 열어가던 시점이다. 민주당은 보수당의 부활을 가져온 ‘개혁 노선’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고자 할 만큼 절박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면서 현재도 집권당이지만 20세기에는 100년 중 68년을 집권했던 영국 보수당의 힘은 “보수주의의 커다란 원칙을 견지하되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 과감한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만들어진 것”(박지향 <정당의 생명력>)이다. 실제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참패한 뒤 실권,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보수당은 가히 혁명적 노선 전환을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의 보수당이 취한 정책과 노선은, 기존 보수당이면 생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것들이다. 양극화 해소, 사회적 약자에 중점이 두어졌고 세금과 금융 정책은 노동당보다 더 왼쪽이었다. ‘보수의 자살’로 비치기에 족했지만, 이렇게 ‘진보적인 보수’ ‘진짜보수 같지 않은 보수’로 탈바꿈한 보수당은 2010년 13년 만에 집권에 성공했다.

6·1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참패한 자유한국당이 본격 노선 투쟁에 진입했다. “수구적 보수, 냉전적 보수 다 버리고 합리성에 기반한 새로운 이념적 지표를 세우자”(김성태 원내대표)는 포문에, “보수이념 해체, 수구냉전 반성 운운은 보수의 자살이자 자해”(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라는 반격이 자욱하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춰 ‘정의로운 보수’를 주창하는 것과, 반공과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에 기반한 우익보수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자는 주장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자리한다. 노선 차이가 이런 정도면 갈라서는 도리밖에 없는데, 그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거창하게 노선 투쟁으로 포장하지만, 실은 ‘친박’과 ‘비박’의 생존 투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궁금하다. 분명 보수당인 한국당은 탄핵당했는데, 아직도 ‘보수의 자살’을 운위할 만큼 지켜야 할 무엇이 남은 것일까. 혹시 아스팔트우파에 기댄 ‘가짜보수’의 기득권 아닐까.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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