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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생이 노추산(魯鄒山) 이성대(二聖臺)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떤 도사가 지나가다 율곡의 관상을 보더니 호랑이에게 죽을 팔자라고 했다. 살려면 밤나무 1000그루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그렇게 했다. 뒷날 도사가 다시 찾아와 밤나무를 셌다. 두 그루가 모자라는 998그루였다. 도사가 호랑이로 변해 율곡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때 어떤 나무가 “나도 밤나무요”라고 소리쳤다. 호랑이는 “그래도 한 그루가 모자라지 않느냐”고 호통쳤다. 나도밤나무는 옆에 있는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라고 외쳤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율목치(栗木峙)에 얽힌 지명 설화의 여러 변형 가운데 하나다.
도사를 속여 율곡을 살렸다는 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엄밀히 말해 밤나무가 아니다.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참나무과로서 잎과 열매가 밤과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분류학상으로 사람과 침팬지 사이에 비유할 정도로 멀다. 더욱이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잎 생김새만 비슷할 뿐이고 밤과는 전혀 다른 콩알 크기의 새빨간 열매를 맺는다. 사람과 쥐처럼 남남이나 다름없는 관계다.
너도밤나무 (출처 : 경향DB)
‘나도’나 ‘너도’는 비슷하게 생긴 식물 이름 앞에 주로 붙는다. 이를테면 나도강아지풀, 나도억새, 너도부추, 너도바람꽃 식이다. 삼촌 관계의 아저씨를 일컫는 방언 ‘아재비’를 뒤에 붙이기도 한다. 미나리아재비가 그렇다. 새에게는 할미새사촌, 원앙사촌, 검둥오리사촌 등처럼 ‘사촌’을 뒤에 붙이기도 한다. 개나리, 개여뀌, 개쑥부쟁이 등 개를 앞에 붙인 것은 기본종보다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각시제비꽃, 각시투구꽃 등처럼 기본종보다 작고 예쁜 것에는 ‘각시’를 앞에 붙인다.
국립수목원이 전남 완도 지역에서 꿀풀과의 새로운 식물을 발견해 ‘속단아재비’(Paraphlomis koreana S.C.Ko et G.Y.Chung)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같은 꿀풀과의 속단과 분류학상으로 가장 가깝다 보니 ‘속단의 삼촌’이라고 부르게 된 셈이다. 너도밤나무가 너도밤나무가 된 이치와 비슷하다. 생물다양성과 유전자원의 가치가 갈수록 소중해지는 상황에서 미기록종을 찾은 것은 행운이고 거기에 새 이름을 붙이는 것은 축복이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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