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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우 논설위원
조조의 군대는 원소군의 맹장 안량과 문추의 활약으로 위기에 처한다. 이때 조조에게 억류된 몸이지만 극진한 예우를 받던 관우가 앞에 나선다. 조조가 기뻐하며 술 한 잔을 따라 권하지만 관우는 “술이 식기 전에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어와서 마시겠다”고 말한다. 과연 관우는 바람같이 말을 달려 두 적장의 목을 베어 돌아와 땅바닥에 내팽개친 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이다.
<삼국지>의 이 광경이 느닷없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에 등장했다. 이준석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어제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본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 삼국지>를 패러디하면서 땅에 뒹구는 적장의 머리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의 얼굴사진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 위원은 또 관우의 얼굴에는 이번 총선에서 문 고문에게 패배한 손수조 후보의 사진을 삽입했다. 이 위원 자신과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조조의 측근들로 그려졌다. 요컨대 관우가 된 손 후보가 문 고문의 목을 베어 땅바닥에 내던지고, 박 위원장과 이 위원이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셈이다.
새누리당 이준석 비상대책위원 l 출처:경향DB
페이스북에 이 만화가 올라가자마자 “뭐 하자는 짓이냐” “너무 엽기적이고 저질스럽다”는 등 누리꾼들의 집중적인 질타가 이어졌다. 파문이 일자 이 위원은 서둘러 만화를 삭제하고 문 고문에게도 사과했다지만 일과성 해프닝으로 넘어갈 사안은 아닐 성싶다. 우선 집권여당의 비상대책위원이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평당원이나 당 밖의 여당 지지자들이 이런 짓을 해도 문제가 될 터인데 몇 달 동안 당을 주물러온 비대위의 멤버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총선 기간 중 발생한 ‘김용민 막말 파문’에서 새누리당이 보여준 태도에 비추어 봐도 ‘엽기 삼국지’는 상식과 통념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당시 새누리당은 김용민 후보의 8년 전 인터넷 방송 발언에 ‘패륜’ 등으로 무차별 공세를 퍼붓지 않았던가. 만일 야당 인사가 땅에 뒹구는 머리에 박근혜 위원장의 사진을 넣었다면 새누리당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제 박 위원장과 대결을 펼치려는 야당의 대선주자들이나 새누리당 내의 비박(非朴) 인사들은 얼굴 전체를 감싸는 투구를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칼에 목이 날아가 땅에 뒹구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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