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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서훈제도는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해 광복절,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셀프 서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정권이 독립운동의 공적을 독점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권 내내 독립유공자는 이승만·이시영 두 사람뿐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하자마자 독립유공자 서훈에 본격 나섰다. 유공자 포상보다는 서훈 확대로 군사정권의 약점을 상쇄하자는 의도가 강했다. 1962년과 1963년에는 각각 유공자 204명과 227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 뒤에는 더 잦아졌다. 이후 서훈을 관장하는 원호처(보훈처)가 설립됐다.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학생들. 뒷줄 맨 오른쪽 유관순 등이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국가보훈처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을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과 교사의 사진. 3·1운동에는 이화학당 등 여학교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조국의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서훈에는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이 있다. 건국훈장은 다시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1~5등급으로 나뉜다. 서훈 포상자는 1만5180명. 이 중 1~3등급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장(30명), 대통령장(92명), 독립장(821명)은 6%에 불과하다. 서훈에서 등급을 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유족에게는 보훈급여금이 차등 지급되기도 한다. 서훈은 전문가로 구성된 공훈심사위원회가 독립운동 공적사항을 엄정하게 평가해 정해진다. 그러나 서훈 이후 장지연·김성수처럼 친일행적이 드러나 훈장이 취소되고, 이승만의 비서 임병직(대한민국장)처럼 과대 평가됐다는 논란도 적지 않다.

정부가 26일 유관순 열사의 독립유공 훈격을 ‘독립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 높이기로 했다. 서훈 승급은 2008년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된 여운형에 이어 두번째다. 유 열사의 승급은 3·1운동의 상징인데도 공적이 낮게 평가됐다는 지적을 수용한 결정이다. 3·1운동 100주년에 걸맞은 상징적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훈격 격상 요구가 거세져 ‘서훈 인플레’가 나타날까 염려된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만주에서 6형제와 독립운동을 한 우당 이회영도,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도 유관순 열사와 같은 3등급이다. 서훈의 기준은 공적에 대한 학술적 평가가 먼저여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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