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보고 듣고 계셨던가요. 당신이 이승의 삶을 마무리하고 산 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의례에서 당신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선생님이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전개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호칭도 변화해 왔습니다. 초기에 당신들은 피해자라는 당연한 호칭조차 얻기가 어려웠지요. 1945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름 없는 피해’를 안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1990년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면서 당신들은 피해자로, 눈물짓는 한 많은 피해자로 우리 역사에 균열을 내며 등장하였지요. 그동안 식민지역사를 누구의 입장에서 써 왔는지, ‘과거청산’이란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가와 여성시민의 관계는 무엇인지, ‘할머니’와 현세대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당신들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주셨습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를 누비면서 피 묻은 언어로 절규했던 증언에서, 유엔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수많은 집회와 강연에서 당신들은 ‘생존자’인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셨지요. 증언은, 있었던 과거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청취자들과 함께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보는’ 체험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지요. 당신들은 그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공할 만한 피해 속에서 당신의 의지와 지혜로, 하늘과 선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죽어간 자들을 증언하는 증인이셨습니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의기억연대가 주최하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373회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집회 현장에 지난달 28일 타계한 김복동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이상훈 기자

그렇게 2000년대가 도래하였고, 우리는 새로운 천년에는 전시 성폭력에 대한 불처벌 관행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절박한 바람으로 2000년 12월,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라는 아시아 10여개국의 참여 속에서 초국적 페미니스트 국제시민법정을 치렀습니다. 비록, ‘2000년 법정’이 내렸던 최종 권고들-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관련해서 자행된 행위들이 국제인도법에 따라 강간과 성노예 범죄에 해당하고, 일본 국왕 히로히토 등 본 법정의 피고인들은 유죄이며, 일본 정부도 성노예제가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따른 피해배상, 진실규명, 피해자 명예회복과 시민교육 등-이 제대로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그 의의는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남한과 북한의 검사단과 피해자들이 하나의 팀이 되어 위안부 문제를 공동 기소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세계의 시민, 언론, 연구자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보편적이고도 역사적인 문제인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체계적 강간이 무엇인지, ‘강제’가 무엇인지 해당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을 다시 쓰게 했습니다. 당신들의 에너지가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복동 당신은 여기서 더욱 멀리 나는 ‘나비’가 되셨지요. 당신은 길원옥님과 함께 세계의 전쟁과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과 연대하고 지원하겠다는 뜻을 강력히 밝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동참으로 ‘나비기금’을 탄생시켰습니다. 나비기금은 콩고내전의 성폭력 피해자들, 베트남전쟁 시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와 아동 등 국경을 넘어 훨훨 날아갔습니다. 당신은 우간다 피해자에게,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에게, 포항지진 피해자에게도 가슴을 열고 과감하게 기부하셨지요. 당신의 고통을 오히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힘으로 승화시켰던 것이지요. 나비 얘기를 하려니, 오히려 당신은 더 높게 더 끝까지 난다는 ‘매’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치러졌어요. 당신의 빈소에는 정말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온 엄마, 복숭아뺨을 가진 고등학생들, 길 가다 그냥 들렀다는 시민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많은 공직자들이 조문하였습니다. 서울에만 조문객이 6000명을 넘었고, 전국적으로 1만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도쿄, 워싱턴 등 국외에서도 거의 20개의 분향소가 차려졌습니다. 장례위원으로 빈소를 잠시 지켰을 뿐이지만, 저는 할머니의 빈소와 같이 풍요롭고 다채로운 장례공간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한 수많은 조문객들이 느슨한 관련성을 가지고 애도하는 그곳에서 하나의 공론장(public sphere)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조의금이 답지하였고, NGO들이 마련한 추모와 문화행사가 계속되었습니다. 혈연도, 학연도, 지연도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흘러 넘쳤습니다. 음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할머니의 마지막 대접을 넉넉히 받았고, 오래된 동지들과 새로운 친구들 간 만남의 장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 장례를 통해 당신의 한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시민들이 진술한 에너지로 만났던 이 애도의 공간에서, 당신의 따스한 가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를 껴안는 넓은 스케일의 운동가 여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피해생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님, 이제 굽이굽이 이승으로 날아가시어 지극한 평화에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나비처럼 매처럼 거듭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