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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남쪽에서는 일찍이 세계정치사에서 본 일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시민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게 매 주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외치고 있다. 입으로는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지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만약에 이 거대한 시위가 통치능력이 없는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한국인은 그저 데모나 잘하는 국민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이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들어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며칠 전에도 대통령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법리에도 맞지 않은 제안을 던지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의원들을 보고 촛불민심은 믿을 게 자신뿐이란 것을 더욱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국민의 대변자이지 사실은 기존의 정치구도 안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는 무리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의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시나브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당과 그 수족인 권력기관들은 야당을 마음대로 주물러가며 반세기 넘게 부패한 권력구조를 유지해 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란 현실이고 타협”이라고 대답한다. 맞다. 문제는 너무 쉽게 원칙을 저버리고 타협한다는 것이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이 그랬고,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은 것이 그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삼김시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11월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야당은 물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삼김의 정치적 적자이거나 그 문하생들이다. 물론 박정희를 비롯해 삼김은 모두 위대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약진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지만 그들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지나친 권모술수와 밀실야합, 지역할거 구도는 한국정치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 가는 시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정치유산을 끌어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민혁명이 일어난 배경이고 또 청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의 시민혁명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제1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이다. 공정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졌다면 어쩌면 그가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제 광주에서 “촛불을 계속 들어 시민혁명을 완성하자”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촛불집회에 가서는 자유발언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미리 예언하지만, 이 작은 사건의 의미를 제1야당 지도부가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민혁명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시민혁명은 시민들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혁명 정세는 대단히 특이하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혁명처럼 인민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국가의 공권력이 건드리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짱짱한데 오직 정치적 리더십만 부재한 상황이다. 이 난국을 만든 책임이 있는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재집권보다는 살아남기에 더 급급할 것이고, 야당은 탄핵만 성사되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촛불민심은 여야를 떠나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순간 가장 강력한 권력인 촛불세력이 제도권 밖의 존재이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한시적인 집합체인지라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바람만 불면 꺼질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거대한 쓰나미이니 거기에 얹혀 권력을 한 번 잡아보자고 한다.

다 틀렸다.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관점이다. 만약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시민혁명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어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촛불시민 세력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소통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든 붙여지겠지만 일단은 그냥 ‘시민권력’이라고 하자. 의회는 여야 협상을 통해 시민권력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한시적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시민권력과 의회가 지정한 비상거국내각이 통할한다. 물론 이 아젠다는 시민들이 계속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다는 가정하에 성립할 것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멀리는 4·19혁명에서 광주민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거쳐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한때 한국의 시위에는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비폭력 평화시위 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축제의 요소까지 곁들어져 외국인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참여하는 문화상품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가히 한국의 시위문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과 선진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시위문화를 일궈낸 한국의 시민들이기에 비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기어이 혁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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