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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초당파 만가(輓歌)

opinionX 2012. 5. 11. 10:29

이승철 논설위원

 


리처드 루거 미국 상원의원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것은 2000년대 초반 워싱턴의 상원의원 회관에서 처음이었다. 루거 의원은 달변이 아니었지만 외교위원회 공청회가 열리면 오랜 연륜에서 오는 해박함과 식견으로 회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었다. 가히 상원 외교위원회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만했다. 런 그가 지난 8일 인디애나주 공화당 경선에서 극보수주의자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고 한다. 루거 의원의 패배에서 미국 정치의 양극화 현상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미국 정치에서 초당파들의 몰락은 이미 시작됐다. 루거 의원과 같은 공화당 소속인 올림피아 스노우에 상원의원이 두 달 전 정치 현상에 넌더리를 치면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스노우에 의원은 루거 의원과 함께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기부양 정책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3인방 중 한 사람이다. 양극화 현상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민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또 초당파인 짐 웹·켄 콘라드 상원의원이 정계은퇴를 밝혔으며 클래드 매카스킬·존 테스터 상원의원은 각각 버지니아와 몬태나주 당내 경선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사실 초당파로 불리는 중도파가 겪어야 하는 정치적 곤경은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 체제 붕괴 후 등장한 러시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급진 개혁파와 이에 저항하는 공산당이 대립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 등이 중도적인 ‘시민동맹’을 결성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이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고 말았다. 이 시기에 러시아 주재 공관에서 근무했던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저서 <격동하는 러시아 정치>(1994)에서 양식있는 중도파의 숙명적 어려움을 지적한 것으로 기억한다.


갈등의 시대를 겪고 있는 우리의 사정은 어떨까.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송장들은/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악재를 넘는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시 ‘만가’의 마지막 구절을 루거의원처럼 자의든 타의든 정계를 떠나는 초당파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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