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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습니다.”

1954년 한국 축구계 대표들이 대통령 앞에서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지만 이런 비장한 맹세가 없었으면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일본과 홈 앤드 어웨이로 예선을 치러야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한국 기권으로 처리될 뻔했기 때문이다. 이때 축구계는 두 경기 모두 어웨이로 치르겠다는 결심을 했고, 대통령 앞에서 필승의 각오를 다지면서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결국 일본을 꺾고 본선 티켓을 따냈지만 그라운드를 밟기까지는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양복을 외상으로 맞춰입고 장도에 오른 한국팀은 미군 군용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갔다고 한다. 거기 가면 유럽 가는 비행기가 많은 줄 알았지만 예약하지 않은 비행기표는 그때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태국 방콕으로 갔고, 거기서 인도 캘커타와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스위스로 들어갔다.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을 떠난 지 엿새 뒤, 경기가 이틀밖에 안 남은 때였다.

사상 최초의 한.일전이자 54년 월드컵 극동지역예선을 알리는 포스터 (출처: 경향DB)


한국이 상대해야 할 나라는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국제대회에서만 32연속 무패행진을 하던 천하무적 헝가리와 싸운 결과는 0 대 9. 이 점수차는 월드컵 역사에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한국 선수들은 아무도 이 결과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장에 쓰러지면서도 최선을 다해 싸운 아름다운 패배였기 때문이다. 헝가리 구스타프 감독이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고 한 말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로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정도였다. 헐벗고 굶주리던 세계 최빈국이 불굴의 투지 하나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400배쯤 잘살게 되었고, 월드컵 본선에 여덟번 연속 진출할 만큼 축구에서도 강국이 됐다. 이제 우리 팀이 ‘목숨 걸고 싸우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다. 선수는 최선을 다하고, 국민은 보고 즐기면 족하다.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의 멋진 승부를 기대해본다.


이종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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