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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년 전, 이맘때 일이다. 2006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각 방송사에서는 야심찬 기획물을 내보이는 한편 독일 현지 중계를 위한 인적 구성을 하고 있었다. 어느 방송사에서 그와 관련된 논의를 마치고 몇몇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던 중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축구공 무게가 450g 정도 되는데, 축구에 관한 프로그램은 공보다 너무 가볍다.”

일행 중에 누군가가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이렇게 반문했다.

“축구는, 아니 월드컵은 이미 엔터테인먼트가 된 거 아닌가?”

그 말은, 그 무렵 어느 대통령의 말처럼, 축구가 이미 오래전에 시장의 머니 게임 종목이 되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축구가, 그리고 월드컵이 단순한 스포츠 종목을 넘어서 거대한 시장이 되었음은 새삼 반복할 필요도 없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개최지 유치권, 경기 중계권, 기업 후원권 같은 고전적인 시장을 지구 전역으로 확대하는 한편 ‘전시권’이라는 개념까지 고안하여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공간에서 다중이 월드컵을 함께 보거나 응원하는 것조차 제어하고 있는 중이다. 도심지의 드넓은 광장에 임의의 공간을 확정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응원이나 촬영은 모조리 자신들의 허락을 받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천문학적인 후원금을 낸 기업이나 방송사만이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우리의 폭발적인 광장 문화 및 후원사가 아닌 기업들이 이른바 ‘매복 마케팅’을 통해 큰 이익을 챙기는 것을 보고 FIFA와 후원 기업들은 2006 독일월드컵 때부터 전시권 개념을 현실화하였다.

선수들의 드높은 경기력과 후원사의 정교한 마케팅, 전 세계를 암울하게 만드는 신민족주의의 창궐로 인하여 올해 월드컵 역시 장외에서는 뜨거운 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벌써부터 주요 방송사는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을 편성하면서 예열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핵심은 시청률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각 방송사로서는 가히 사활을 건 시청률의 격전장이다. 드라마나 예능의 경우 서로 다른 줄거리나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비록 같은 시간대에 편성된다 해도 기계적인 비교 평가를 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규모 스포츠 대회는 다르다. 우선 콘텐츠가 동일하다. 비중 있는 큰 경기는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한국 대표팀의 경기는 방송사 모두가 동시 중계를 하기 때문에 시청률 및 그에 따른 수익과 이미지 제고에 있어 장외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월드컵, 스포츠 넘어 거대 시장
방송사들 중계·현장 경험보다
대중적 인기·예능감 앞세워
시청률 경쟁에만 몰두 아쉬워


최근 벌어진 ‘전현무 캐스팅 논란’은 이런 배경 속에서 터진 일이다. KBS는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대중적인 인기와 뛰어난 예능 감각을 지닌 전현무씨를 월드컵 전문 캐스터로 영입하려고 했다. 이에 KBS 아나운서 및 노조가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시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KBS가 무리를 해서라도 전현무씨를 캐스팅하려 한 것은 그의 뛰어난 진행 능력을 통해 지난 소치올림픽 때 주요 종목에서 패했던 시청률 전쟁을 만회해 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2008년 12월 ‘직원의 프리랜서 전환 이후 3년간 KBS 프로그램 참여를 금지’하기로 한 노사 합의가 발목을 잡았다.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심화될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스포츠를 두고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실제 경기의 예측 불가능성과 수많은 변수들을 두고 하는 말일 뿐, 실제로 스포츠에는 근대 이후 인간의 역사라는 드라마가 곳곳에 배어 있다. 희비극이 교차하는 현대사의 수많은 사건과 상처들 위로 스포츠의 역사가 피어올랐으며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이렇게 응축된 다양한 이념과 감정이 폭발하는 장이 된다. 따라서 제대로 스포츠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이를 다채롭게 공부하고 살펴서 다양하게 제공해야 한다.

그런 점이 결여되다 보니 어이없는 실수가 벌어진다.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의 경우, 근대 산업혁명기의 슬픔과 분노가 펼쳐지고 있음에도 한국의 방송사들은 ‘산업 발달의 역동적인 모습’이 펼쳐진다고 했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 개막식의 경우, 꼼꼼하게 준비한 SBS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좋은 세상 만나서 너무 좋다는 식의 호들갑스러운 코멘트의 나열이었다. 월드컵이든 올림픽이든 아프리카 선수들을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탄력 있는 구릿빛 피부’라거나 ‘넘치는 힘’ 하면서 인종차별적 발언도 쉽게들 한다. 그들도 작전이 있고 전술이 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유럽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각 방송사들이 오랫동안 누적된 중계 경험과 노련한 현장 대처 능력, 다양한 정보의 공유를 통해 월드컵을 준비하기보다는 오로지 대중적인 인기와 순발력 넘치는 예능감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이와 넓이를 지닌 스포츠 전문 캐스터를 길러내고 그 능력과 정보를 후배 캐스터들에게 공유하고 전수하는 풍토는 사라지고 두세 달 반짝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도만 찾는 듯 보인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축구를 공부하고 각국의 선수들 정보를 모으고 여러 대륙의 스포츠 문화를 탐구하는, 그런 캐스터를 길러내는 일은 무망해 보인다. 시청률에 사로잡혀 긴급히 외부 수혈로 채우다 보면 축구공의 무게 450g보다 가벼운 말들이 넘쳐나는, 경쾌한 것이 아니라 경박한, 그런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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