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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부채질하듯 방충망에 붙은 매미 울음만 요란하다. 이렇게 더울 때면 으레 나는 1950년 여름이 떠오른다. 유난히 덥고 가물었던 그해 여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 인민군 부대가 총성도 없이 한바탕 지나가고 이어서 예고 없는 미군 폭격이 거리를 짓부순 다음 그 산촌 마을은 지금까지와 아주 다른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다른 세상에 찾아온 뜻밖의 평온은 북한 체제를 피해 월남한 우리 가족에게는 불안과 위험의 신호였다.

결국 7월 중순쯤, 우리 가족은 필수품 몇 가지만 챙겨서 길을 떠났다. 일행은 일흔 다 되신 할아버지, 마흔 전후의 부모, 아홉 살의 나, 여섯 살과 세 살의 두 동생들, 이렇게 모두 여섯이었다. 우리의 신원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게 유일한 목적인 데다 제대로 걸음을 걸을 만한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으므로 속도는 한없이 느렸다. 조금 걷다가 주저앉고 조금 더 걷다 잘 곳을 구하곤 했다. 봉화와 영주를 거쳐 예천까지 가는 데 열흘은 걸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얼마나 덥던지! 신작로 양옆으론 잎사귀 늘어뜨린 미루나무만 지친 듯이 서 있고 땡볕을 가려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가다 보면 가끔씩 참외 원두막이 나타났고 그 아래 가마니 위에 싱그럽게 참외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거기 들러 쉴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병이 나셨다. 할 수 없이 예천 변두리 어느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결국 춘양 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 무렵이면 가끔 행군하는 인민군 부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적의도 호의도 보이지 않던 소년병들의 삭막한 얼굴이 아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피란 보따리를 둘러메고 낯선 길을 따라 걷던 우리도, 원치 않는 전쟁에 동원되어 사지(死地)를 향해 행군하던 그들도 생각해보면 정체 모를 악귀의 마수에 사로잡힌 포로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가을바람이 불면서 전세가 바뀌어 다행히 우리는 무사하게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선에서는 아직 전투 중이었고 다른 지방에서는 그사이 불행한 일이 많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춘양은 영화 속의 동막골보다 더 평화롭게 6·25를 넘겼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흐른 1980년 여름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내게도 잊지 못할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 그해 2월 말, 나는 해직교수 신분을 벗고 영남대에 자리를 얻어 대구로 이사했다. 30년 전의 정처 없는 피란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안정된 생활을 막 시작할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듯이 이른바 ‘안개정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 속에서 12·12부터 5·17까지 전두환 일당의 군사반란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몇 달 전까지 내가 대표로 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비롯하여 ‘문학과지성’ ‘뿌리깊은 나무’ 등 170여 개 월간·주간지들이 등록취소 되고, 대학·언론사·정부기관 등에서 숙정(肅正)이라는 이름의 대량 추방이 강행됐으며, 구속된 김대중씨 등에 대한 내란혐의 재판놀음까지 개시되었다.

대학에는 군인들이 진주했고, 교직원들도 교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계엄령 확대와 더불어 휴교가 되었으므로 리포트 제출로 학생들 기말성적을 처리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광주 사는 문우들을 통해 이미 그곳 소식을 대강 들었던 터였는데, 이제는 가끔 올라가는 서울에서도 참사가 벌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날씨도 여름 같지 않게 썰렁했다.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장마의 뒤끝은 폭우였다. 그러고 나서도 본격적인 더위는 찾아오지 않았다. 단단히 땀 흘릴 각오를 하고 내려온 대구조차 기온이 아침엔 20도, 한낮에도 30도 아래였다. 냉해 때문에 농사 망친다, 피서지에 사람이 없다는 보도가 연일 나왔다. 이래저래 울적해서 책상 앞에 앉아지지 않았고, 해직된 고 이수인 교수(후일 국회의원)의 전화 호출로 툭하면 삼삼오오 시내 술집에 모였다. 1950년과는 전혀 다른 뜻에서의 참담한 여름을 마치 거센 물살을 여럿이 팔짱 끼고 건너듯 겨우 보냈다.

땡볕 내리쬐던 여름도, 냉기 가득했던 또 다른 여름도 어느덧 오래전이다. 그러나 그 여름들의 고난과 위험은 수십 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잠재적인 형태로는 사실상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5·17반란을 흉내 낸 군사쿠데타 음모는 그럭저럭 수습의 가닥을 잡았다고 할 터이니 접어두기로 하고….

정전협정의 조인으로 당장의 전투는 중지되었지만,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다만, 대한민국에 사는 일반인들의 일상은 전쟁의 지속 상태를 잊고 지내도록 생활이 설계되어 있을 뿐이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망각’의 내용물을 만인이 지켜보는 대낮의 밝음 아래 꺼내어 실체를 밝히고 진정한 평화체제를 실현할 때가 되었다. 아니, 늦었다.

엊그제 싱가포르 회의에서의 남·북·미 외교장관 접촉을 통해 또다시 드러났듯이 북한은 종전을 요구하고 있고 미국은 ‘비핵화’를 빌미로 종전선언을 미루고 있으며 한국은 어정쩡하나마 상이한 입장들 간의 접점을 모색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장면은 사실은 등장인물만 그때그때 교체되었을 뿐, 1953년 이래 미국과 북한 사이에 되풀이되어온 낯익은 ‘밀당’이다.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만 보더라도, 정전협정은 전쟁 당사자 간의 빠른 평화협상을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54년의 제네바 회담 때 국무장관 덜레스가 중국 저우언라이의 요구를 거절한 이래 줄기차게 협상을 회피해오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정착에 주도권을 쥔 나라가 미국임에도 그 나라의 주류 정치인과 주요 언론은 북한에 대한 불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한반도 안보위기를 북한 탓으로만 돌려왔다. 그게 그들의 군사적·경제적·정치적 이익에 부합해서라는 건 웬만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이 독판치던 시대는 저물었고 북한이 원하는 것도 다름 아닌 자주와 평화와 번영이다. 그런 세계사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정당한 생존의 길 아니겠는가.

<염무웅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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