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삶이 예술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예술가의 작품이란 어린 시절 엄마 또는 삼촌 또는 누이의 어깨너머로 접했던 세계의 비밀스러움이 내면화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를 작가이자 시네필로 만들어준 것은 유년기의 영화구경이었다. 극장의 장막을 걷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의 떨림,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앉을 때 들려오던 아련한 경음악소리, 어둠을 가르고 스크린까지 뻗어가던 한 줄기 빛, 그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그날 어둠 속에 펼쳐진 세상의 황홀과 비극, 삶의 진실에 사로잡혀 누군가는 배우가 되고, 누군가는 작가 또는 감독이 된다.

소설과 영화는 매체는 다르지만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 감독의 고유한 연출법을 미장센이라고 일컫는데, 발자크의 소설들에서 초기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첫 장면과 인물 등장 방법을 차용해 발전시킨 것이 영화의 미장센인 셈이다. 소설가로 출발해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의 영화들이 첨예한 주제의식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성적인 미장센으로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이 13일 오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_이선명 인턴기자

서사성과 더불어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은 대중성과의 관계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관, 창작관에 따라 상품이냐 예술이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미장센이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의 경우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다.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기록하고, 전하는 다큐 기법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영화제를 통해 진면목을 드러내고, 관심을 촉구한다. 지난해 칸 영화제 대상작 <디판>과 엊그제 폐막한 올해 베를린 영화제 대상작 <파이어 앳 시(Fire at sea)>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난민의 현실과 참상을 그린 영화들이다. 특히 <파이어 앳 시>는 다큐영화로 작년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다큐소설과 맥을 같이한다. 칸과 베를린의 선택은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영화산업과의 공존과 저항이라는, 영화제의 두 가지 기능에서 후자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부끄럽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 전쟁 중이다. 지난해 10월 영화제에서 부산시는 세월호 참사 관련 다큐영화 <다이빙벨>의 상영 철회를 요구했고, 집행부는 거부했다. 이후 부산시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사표를 권고하고, 협찬금 중개 수수료 부정지급 혐의로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리고 정부는 영화제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토니 레인즈,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하는가’, 씨네21, 1041호).

영화제의 프로그램 운영은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집행부의 고유 권한이다. 그 외 어떤 것도 월권이다. 올해로 21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에 소재하고 있지만 부산시만의 영화제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며칠 전 세상을 뜬 움베르토 에코는 새로운 흐름을 억누르는 문화를 반동적인 문화라고 경고했다.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요란하지 않으나 예리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에코의 전언을 환기하며, 세계의 참상에 인류애의 경종을 울린 칸과 베를린 영화제의 선택을 의미심장하게 되새겨볼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