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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순간순간 자라나는 봄빛 속에 사진집을 펼쳐놓고 오며가며 바라본다. 더도 덜도 말고, 일기를 쓰듯 하루 한 장, 한 장면과 만난다. 사진 한 장에 누군가의 일생, 어느 골목의 역사, 어느 계절, 어느 하루의 흐름이 담겨 있다. 휴(休), 공(空), 하늘, 옛 동네, 구석, 인생, 산, 항구, 균형, 구름, 기다림, 무수함, 바다, 바위, 부처, 환희, 몸, 사라짐(滅). 이들은 사진집의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궁극의 리스트’이다.

‘궁극의 리스트’는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문학예술을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면서 명명한 제목이다. <궁극의 리스트>를 위해 에코가 선택한 장면은 190컷, 고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20세기 앤디 워홀의 팝아트까지 아우른다. 에코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궁극의 리스트가 가능하다. 소설을 매개로 나를 사로잡은 궁극의 리스트를 구성해볼 수 있다.

이 목록은 흥미롭게도 소설보다도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 나아가 그림, 영화, 공간(여행), 친구, 사랑 등으로 궁극의 리스트를 옮길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군가의 궁극의 리스트는 그 사람의 삶(내공)과 욕망을 대변한다.

손가락에 담배를 들고 포즈를 취한 움베르토 에코._경향DB

‘휴(休)’에서 시작해서 ‘사라짐(滅)’까지, 18장의 목록으로 구성된 이 사진집 제목은 <요가, 하늘가에서>(눈빛)이다. 사진집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이상, 요가와 시(詩), 자연이 어우러진 향연이다. 서울 가회동, 전주 한옥마을, 서초동 주차장, 북촌 골목과 기와지붕, 경동시장, 전남 무안, 삼성동 코엑스, 삼척항 등. 전국 방방곡곡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틴 프로스트는 요가를 한다. 그 장면을 이스라엘 출신 포토그래퍼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이 흑백과 컬러로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마틴 프로스트는 다시 시로 썼다.

사진의 대상이자 시를 쓴 마틴 프로스트는 프랑스인으로 한국어와 영어, 일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전 파리 7대학 한국어과)이자 요가 교수(연세대)이다. 그녀의 요가와 시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정신과 지혜의 산물이다. 그녀에 따르면 요가는 육체적 수련이다. 그러나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정신적 혼란의 정지(停止)’이다. 곧 요가는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상업적으로 유행하는 체중 감량을 위해 본성을 해치며 고통스럽게 감행하는 다이어트 요가와 구별된다.

마틴 프로스트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풍경과 풍물에 반해 수시로 지방으로 향했고, 특히 강진의 쪽빛 하늘과 바다를 사랑해 파리에 한국의 청자정원 건립 사업을 도모하는 등 한국의 문화를 프랑스에 알리는 일로 평생을 살아왔다. <요가, 하늘가에서>는 내국인 못지않게, 아니 더 깊이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체득한 그녀의 다정다감하면서도 경이로운 장면들을 담고 있다. 요가와 시, 그리고 사진의 삼중주에 깃든 궁극의 리스트를 새봄의 메시지로 전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생각하지 못했던 고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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