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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 풍파를 견딜 나이가 아니다.” 최순실씨 변호를 맡고 있는 이경재 변호사의 한마디가 젊은 세대를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억울하게 죽어간, 정유라씨보다 한 살 어린 김군은 풍파를 견딜 나이인가?

풍파를 견딜 나이라서 삼성의 하청업체들은 20대 노동자들에게 메탄올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일을 시켜서 실명에 이르게 했단 말인가? 한 달이 멀다 하고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에서 들려오는 하청노동자 상당수가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인데, 이들에게 불어오는 풍파는 정당한 것인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정반대의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삼성과 현대차 등 재벌 그룹의 2세, 3세들은 20대 초반에 본사 또는 핵심 계열사에 입사해 경영기획실 요직은 물론 이사와 임원으로 등극하는데, 이들은 충분히 세상의 풍파를 견딜 나이라서 그런 것이란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이놈의 세상은 청년들에게 너무 많은 풍파를 견딜 것을 요구한다. 일자리는 부족하거나 질 낮은 일자리뿐이어서 ‘미생(未生)’을 강요당한다. 임금과 고용만 불안한 게 아니라 다치거나 죽기 쉬운 위험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하지만 흙수저와 달리 금수저에겐 이런 풍파를 이겨낼 수단이 차고 넘친다. 억울하면 돈 없는 부모를 탓하라? 그래, 우선 금수저에겐 부모의 돈과 권력이 있다. 그런데 재벌과 관료들, 비선 실세들이 가진 권력이란 것도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거나 위임된 것이 아니다.

선출도, 위임도 안되었는데 어떻게 그들은 권력을 갖게 되었는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그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적당한 인물을 골라 선거에서 선출되도록 돕는다. 아니, 심지어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이 선출되더라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구워삶으면 된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그리고 관료들이 합심해 만든 미르와 K스포츠 재단에 재벌들이 774억원을 상납한다. 최근 속속 폭로된 내용들에 따르면 재벌들의 출연은 노동개악·성과퇴출제·민주노조 말살을 정부가 추진하도록 하기 위한 뇌물이거나 수고비 성격임이 드러나고 있다. 검찰은 또다시 구체적인 대가성이 약하니 어쩌니 하며 면죄부를 주려 하겠지만, 재벌들의 상납금은 최소한 ‘보험금’으로 볼 수 있다.

올 상반기를 기준으로 국내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무려 759조원에 달한다. 774억원으로 759조원을 지킬 수만 있다면 0.01%의 보험료이니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가.

이런 방식으로 재벌과 관료, 비선 실세들로 구성된 ‘금수저 커넥션’이 구성되고 대를 이어 돈과 권력이 상속된다. 선거에 나서지도 않고 대중에게 검증되지도 않은 이들이 입법·사법·행정부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국정농단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11월12일 100만 촛불로 구체화된 대중의 분노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이다. 너희들이 뭔데 우리 운명을 좌지우지한단 말이냐!

재벌독재와 관료독재, 비선 실세의 독재를 뿌리뽑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헌법’ 얘기가 많이 거론되는 요즘 트렌드를 따르자면, 한국의 헌법이 이런 독재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해둔 조항이 2개 있다. 하나는 헌법 제21조가 규정하고 있는 집회결사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헌법 제33조에 따라 노동조합을 만들어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한 권리이다.

노동자와 시민은 100만 촛불의 형태로 집회결사의 자유를 발동하고, 저항의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 국면으로 노동조합 결성과 단체행동이라는 권리를 발동시킬 차례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 민중총궐기의 중심축에 민주노총이 서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민주노총은 오늘 11·12 민중총궐기에 이어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총파업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한다. 재벌독재, 관료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핵심 수단 중 하나가 노동조합이라는 사실을 2000만 노동자와 5000만 국민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출발점일 뿐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고작 10%다. 노동자 10명 중 1명만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 이렇게 낮은 조직률을 보이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다.

노조에 가입하면 해고, 징계, 고소고발 등 각종 부당노동행위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불법이 아니냐고? 검찰과 관료들은 재벌과 사장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재벌과 사장, 검찰과 관료가 함께 ‘금수저 커넥션’을 구성하고 민주노조 말살과 노조 탄압을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100만 촛불의 여세를 이어갈 노동조합 결성의 물결을 만들어갈 때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금수저들은 풍파를 이겨낼 많은 수단이 있지만, 헬조선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우리에겐 촛불과 함께 노동조합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청년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풍파!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그 풍파를 이겨낼 힘이 생긴다. 저임금도, 비정규직의 고통도, 위험의 외주화도, 노동조합의 힘을 통해 바꿀 수 있다.

오늘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지만 시험지에도, 수험과목에도, 노동조합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학교에서도 노동조합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 교사들도 나서고 학생들도 함께 요구하자. 100만 촛불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라는 살아 있는 역사의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와 노동조합 힘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점을 보여줄 때이다.

박근혜 퇴진! 노동조합과 함께!

오민규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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