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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했다. 건물 언저리에 내팽개친 컴퓨터 안에 숨겨둔 세상의 비밀을 눈 밝은 기자들이 파헤치고 있을 때, 나는 여기에 실을 글 삼아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청년 고용에 대해 말만 내세우고 이룬 것은 없다고 따지려고 했다. 청년실업률이 매달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당신은 어디에’라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컴퓨터에 제대로 된 폴더 하나 없이 쑤셔 넣어둔 파일들의 내용이 드러나자, 나는 쓰던 글을 엎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화가 났다.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을 문뜩 떠올렸다. 평생 화만 내고 살았던 사내다. 맨날 얼굴에 화가 잔뜩 난 사람만 나오고, 보는 사람도 화나게 만드는,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영화만 만드는 감독인데, 늘 이런저런 상을 받는다. 이번에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뿔만 내면서도 온갖 찬사를 받는 재주는 타고 난 셈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기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로치 감독은 그 질문이 되레 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멈칫하다가 이렇게 말했단다. “영화 만들려고 조사하러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사흘 정도 제대로 먹지 못한 청년을 만났어요. 냉장고가 텅 비어 있더군요. 어느 여인은 나라에서 주는 공짜 음식을 받으러 가는 걸 죽도록 싫어했고, 어떤 사내는 하루 일거리를 찾아 새벽 5시부터 줄 섰다가 딱 한시간 후에 일감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살기 위해 끊임없이 모욕을 당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 것에 화가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그녀도 화를 자주 내었다(나는 이제 ‘그녀’를 ‘그녀’라고 부르기로 한다). 로치는 성난 얼굴로 권력에 도전했지만, 그녀는 화를 내며 권력을 지켰다. 책상도 치고, 언성도 높였다. 그러면서 말로 천냥 빚을 갚겠다는 의지도 더러 보였다.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에 “청년들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짧게 건넸다가, 청년들로부터 “우리는 당신 때문에 잠이 안 온다”는 쓴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청년에 대한 같은 걱정이라도 그녀의 말에는 구체성이 더해졌다. 딱히 이유는 분명치 않았지만, 그녀의 것 같지 않던 구체성.
그녀는 틈이 날 때마다 부모의 마음에 비유했다. 작년에는 그랬다. “직장을 못 구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청년과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정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라고. 그러다가 올해에는 근심이 더 깊어졌는지 “저도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심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박복한’ 처지를 국민들이 다 아는 터라, 이런 구체성의 연원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잠이 안 오고 노심초사하며 시커멓게 태워가던 가슴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녀’의 것이었다. ‘또 다른 그녀’는 아마도 ‘또 다른 자식’ 때문에 마음을 끓여 왔고, 그런 개인적 심사가 국민에게 전하는 ‘그녀의 말씀’에 담긴 것이다. 그녀의 말인지, ‘또 다른 그녀’의 말인지 알 수 없다. 거짓을 반복하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듯, ‘또 다른 그녀’의 말을 반복할수록 그녀의 말이 되는 듯했다. 감정이 실리고 아마 그래서 화도 냈을 테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하며. ‘또 다른 그녀’가 알뜰히 챙겨준 옷을 입으며 그녀는 아마도 몰아의 경지에 도달했으리라.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화를 내야 하는가. 우리는 완벽한 ‘개인적 서사’가 담긴 ‘말씀’을 그동안 열성적으로 읽고 분석했다. 그녀의 말은 곧 정책이고 칼날이고 ‘단두대’며 삶이고 죽음이니, 전문가와 언론은 연일 그 깊은 뜻을 헤아리고자 요리조리 뜯어보고 했다. 비판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담화문을 수십번은 읽고 글을 썼다. 앞뒤 논리가 맞지 않고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꽤 목청을 높였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그녀는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이른바 4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리면서 “노동개혁 없이는 청년의 절망도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통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한 뒤 “정부와 공공기관도 노동개혁과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솔선수범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철딱서니 없이 그녀의 단어 하나 하나를 따지고 들었다. 그녀의 언어가 아닌데 너도나도 없이 그렇게 따지고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것이 아닌 언어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 다른 그녀’가 그려놓은 시나리오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가 되어 제 역할을 했다. 웬만한 스릴러 영화보다 더 엽기적이다. 어설프게 보관된 컴퓨터 하나가 열리면서, 우리 주위에 오랫동안 세워져 있던 영화세트장이 무너졌다. 여긴 도대체 어디인가.
그녀의 영화는 ‘또 다른 그녀’ 덕분에 완벽할 뻔했다. 우린 꼼짝없이 속을 뻔했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녀들의 놀잇감이 된 듯하여 자존심도 찌그러졌다. 무너진 영화세트장을 다시 살펴보자니, 속이 아예 허연 잿가루가 되어 간다. 하지만 그러고 말 것인가.
그녀와 ‘또 다른 그녀’가 시나리오를 짜고 연출을 고민할 때, 국가는 깜빡 깜빡 부재했다. 마치 ‘컷’이 선언된 세트장 같았다. 그러나 현실의 필름은 끊임없이 돌아갔다. 세월호는 그렇게 침몰했고 학생들은 소리치며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녀들은 끝내 ‘액션’을 외치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에 맞고 쓰러졌지만, 한번 정해진 시나리오는 끝내 수정되지 않았다. 한번의 출연도 소중한 엑스트라처럼 경찰도 검찰도 그리고 병원마저도 메가폰 소리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잊혀지고 어두운 지하의 세계 위로 ‘또 다른 그녀’의 ‘또 다른 여식’은 말 한 마리 얻어 타면서 여유로웠다. 세상의 끔찍함이 어찌 이보다 완벽할까.
이건 나라도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 내 속 한번 시원해지겠다고, ‘나라도 아닌’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를 더 슬프게 하지 말라. 죽음의 일상을 만들어낸 참혹한 세상에서는 슬퍼할 자유가 없다. 화만 내서도 안 될 일이다. 당당히 말하라. 이 나라에 ‘그녀’와 ‘또 다른 그녀’, 그리고 그녀들의 하수인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선언해라. 모두 몰아내라.
그녀에게 내려가 달라고 사정하지도 말라. 그녀가 시골로 내려가는 것을 허하지도 말라. “속았지” 하며 혀 쏙 내밀다가 사람들의 성난 얼굴을 보고 “미안” 하고 사라지면 그만인가. 그녀의 자리와 시간은 이제 우리의 연출에 의해서만 결정돼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따진 후에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켄 로치의 영화처럼, 지금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방식으로 말할 것이다. 여기는 우리의 나라다. 끔찍한 그녀들, 이제 당신들은 가만있어라.
이상헌 경제학 박사·‘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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