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다. 구한말에 관심이 많아서 ‘대한자강회보’ 등의 잡지며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 신문을 읽었다. 이쪽은 지금은 연구자가 꽤 있지만 당시에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다. 학위 논문을 쓴다 해도 별반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조선 후기 역관이나 의관 등 기술직 중인과 서울 관청의 하급관리인 서리가 주축이 된 한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자료를 읽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항문학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여항문학 방면의 최초이자 대표적 저술로 구자균의 <조선평민문학사>가 있다. 이 책은 원래 구자균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졸업논문이다. 요즘 대학에도 졸업논문 쓰는 관행은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베끼기로 일관하기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학부 졸업논문은 엄청난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한국 한문학의 역사를 최초로 엮은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 역시 경성제국대학의 졸업논문이었다.

어쨌거나 구자균의 <조선평민문학사>는 당시로서는 사뭇 새로운 시각의 논문이었다. ‘평민’이란 말에서 보듯, 이 논문은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한문학을 다룬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양반과는 구분되는 어떤 문학적 성격을 찾으려 했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평민문학사>는 ‘평민적’ 성격보다는 대개 중인과 서리들의 문학활동 자료를 사적(史的)으로 거칠게 엮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구자균이 멈춘 그 지점에서 출발해 무언가 중인·서리 문학의 성격을 찾아보자는 것이 나의 속내였다. 다만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상론할 것까지야 없겠다.




먼저 자료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알려진 어지간한 자료는 수집할 수 있었고, 또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상당수 수집했지만, 꼭 보고 싶은 어떤 자료들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예컨대 <조선평민문학사>의 참고문헌에 <우봉집>이란 문집이 있었지만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우봉집>은 조희룡의 문집이다. 조희룡은 <호산외기(壺山外記)>란 중인·서리들의 전기집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그는 김정희의 고제(高弟)로서 추사의 글씨, 곧 추사체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돌아다니는 추사의 글씨 중 많은 부분이 조희룡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희룡은 어쨌거나 19세기 여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의 문집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우봉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 하나 보고 싶은 책은 <벽오당유고(碧梧堂遺稿)>였다. 이야기가 약간 우회하지만, 먼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부터 시작해 보자. <근역서화징>은 근대 이전 한국의 서화가에 대한 정보를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서화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둘도 없는 중요한 자료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첫머리에 자신이 인용한 서적들의 목록을 제시해 두었다. 이 중 <근역서화징>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었다. 그의 부친 오경석은 김정희의 제자였고 유명한 서화 수장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집에 천죽재라는 서화 수장고를 두고 있었다. 천죽, 곧 ‘하늘 대나무’는 불에도 타지 않는다 하니, 서화 수장고로는 안성맞춤인 이름이다. <근역서화징>에는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 곧 오경석의 서화비평집에서 인용한 글이 상당수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책 <천죽재차록>도 현재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다.


이외에 유최진이란 사람의 <초산잡저(楚山雜著)>란 책도 자주 인용되었고, 거기에는 중인들의 시회에 관한 활동이 실려 있었다. 이 책과 유최진의 다른 책들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오세창문고에서 찾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벽오당유고>라는 책은 찾을 수 없었다. 나기란 사람의 문집이었는데, 이 책에서 인용된 자료가 중인·서리의 문학활동을 꽤나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도서관에도 이 책은 실려 있지 않았고, <근역서화징>을 제외한 어떤 문헌에도 이 책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어느 날 교보문고에 갔다. 보통은 인문서 코너 서가를 훑고 필요한 책을 구입해 나오는데, 그날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술 방면 쪽 서가로 그냥 가보았다. 서예 쪽 책을 모아둔 곳이었다. 어떤 서가에 서가의 사이즈보다 큰 책이 꽂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판형이 보통 책의 두 배나 됨 직한 그 책을 뽑아 보니, 왕희지의 글씨, 곧 법첩(法帖)을 영인한 책이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이었다. 후루룩 넘겨보니, 몇 페이지 안되는 책이라 금방 끝이다. 그런데 눈에 확 들어오는 페이지가 있다. 다시 그 페이지를 열었더니,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벽오당유고>의 첫 면이 아닌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찬찬히 넘겨보니, 책의 대부분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법첩이고, 끝부분은 다른 자료를 영인해 실어놓은 것이다. 정교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도 한 페이지 실어놓았다. 나수연에 관련된 자료였다. 나수연은 구한말 황성신문의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 책의 편자는 나기가 나수연의 아들이라면서 특별히 나수연에 관한 자료를 실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수연 아래에 딸린 정교의 주석이었다. 그는 나수연이 대원군의 겸인(겸人)이라는 것, 또 겸인은 서울 경화세족가의 청지기라는 것, 그들이 중앙관서의 서리가 된다는 것을 밝혀놓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