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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정치적 격변은 책을 재로 만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이게 한다. 조선시대 역모 사건이 나면 책은 흩어지고 옮겨지고 다시 모였다.

실학자로 유명한 유수원(柳壽垣)이 1755년 나주괘서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책은 홍봉한(洪鳳漢)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듯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책을 흩고 옮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책을 소멸시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으는 것은 전쟁이다.


조선의 책은 임진왜란 때 한 번 소멸되었다. 이후 책에 크나큰 액운이 된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6·25전쟁이다. 유명한 장서가들의 회고담을 보면 반드시 6·25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원본을 소장했던 최남선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최남선은 6·25전쟁 당시 서울 우이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장서 역시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육당문고(六堂文庫)는 6·25전쟁 이후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조지훈 선생도 6·25전쟁 때 장서를 상실한 것 같다(‘나의 서재’). 화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피란 간다고 비워둔 집을 도둑이 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도둑이 범상한 도둑이 아니라 상당한 식자층이었던 것 같다. 선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책 도둑도 공부하는 방면이 나하고 같은 사람이던 모양으로 내가 애써 모으고 아끼던 고전, 국학 연구 관계 서적은 깡그리 가져가고 여남은 권 남은 건 다 낙질(落帙)로 병신이 돼 버린 것이다. 값으로 따지면 비싼 것도 안 가져간 것이 있고, 초판본이나 보잘것없는 체제의 진귀본(珍貴本)을 다 가져간 걸 보면 견식이 있는 내 학문의 동지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맛볼 때도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책 도둑은 국문학 쪽으로 상당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초판본이나 진귀본을 모두 가져간 ‘견식이 있는 자’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선생의 집에 희귀하고 귀중한 책들이 있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편 그 도둑을 ‘학문의 동지’로 일컫는 선생도 대단한 도량이다.

이희승 선생도 6·25전쟁 때 장서를 잃어버렸는데, 피란하고 난 뒤가 아니라, 9·28수복 직전이다. 선생은 ‘서재’란 글에서 ‘책 권’이나 쌓여 있었던 서재가 9·28이 아니라 9·28 새벽 채 밝기도 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앞서 서재를 이야기할 때 들었던 일석서실의 1만권 장서는 뒷날 다시 모은 것이다.

쟁은 책만 없애는 것이 아니다. 책 외에도 문서, 서화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멸시켰다.

서예가 정해창(鄭海昌)은 ‘구책(舊冊)의 정취’란 글에서 전쟁으로 책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만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 스스로 위로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섭섭하고 답답하고 생각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비첩(碑帖)이요 무장사 단비첩(斷碑帖) 중에서도 이석첩(二石帖)이라고 했다. 무장사비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비석이다. 그 비석의 세 조각이 남았는데, 그중 두 번째 것을 탁본한 비첩을 전쟁통에 망실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이렇게 애써 모은 책과 문화재를 소멸시켰다.

전쟁은 책을 소멸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다시 모으기도 한다. 국문학계의 원로인 아무개 선생님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분의 자료는 6·25전쟁 이후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모은 것이라 했다. 국학 계통으로 연구하신 분들의 추억담을 들으면 다양한 문화재가 그때 쏟아져 나왔고 헐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내가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쪽은 책이다.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홍효민(洪曉民)은 ‘탐서벽(探書癖)’에서 30년 동안 서점 주인과 안면을 트고 외상으로 사들인 책이 6·25전쟁 때 다수 분실되었지만, 1·3후퇴(1·4후퇴를 말하는 듯) 때에 다행히 대전에 와서 몇 군데 대학에 관계(아마도 시간강의를 한 것을 말하는 듯)하게 되어 다시 책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워낙 책값이 비싸서 책이 모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말이 재미있다. 남들은 1·3후퇴 때에 곧잘 헌책을 ‘근으로’ 산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책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그냥 무게로 달아 팔았다는 것이다. 괜찮은 책들을 무게로 사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횡재가 아니었을까?

홍효민 역시 대전에서 근으로 달아 파는 책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런 책이란 ‘태평양전쟁 때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책’이 아니면 펭귄북스라고 한다. 별 가치가 없는 책이란 것이다(홍효민의 생각과는 별도로 ‘태평양전쟁 때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책’도 지금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물론 그 뭉치 중에서도 좋은 책이 있어 덤비지만, 그럴 경우 주인은 ‘그건 달아 파는 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홍효민은 좋다 말았다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전쟁과 같은 격변은 책을 소멸시키는 한편 책의 장소를 옮겨 다시 집합시킨다. 앞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들었는데, 그곳 역시 책이 쏟아져 나온 것은 6·25전쟁 이후다.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 역시 6·25전쟁을 계기로 생긴 것이다. 보수동은 남포동, 광복동, 대신동을 옆에 두고 있고, 이 일대에 서울에서 피란 온 학교가 많았다. 따라서 책의 수요가 당연히 있었다.

한두 서점이 지금의 골목 어귀에 생기기 시작해서 긴 골목 전체가 책방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집에서 훔친 책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기한(飢寒)에 몰린 책 주인이 자신의 책을 헐값에 처분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책은 다시 모이기도 한다. 하나 첨언하자면, 보수동의 위쪽 대신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거주지였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한때 많았던 일본책들은 아마도 그들의 소유였을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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