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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논문을 쓸 무렵이다. 앞서 말했듯 논문 주제는 조선후기 기술직중인과 경아전의 한문학이었다. 기술직중인은 의원이나 역관, 계사, 화원 등 주로 조선의 관료체계에서 특정한 전문분야의 관료직을 수행하는 신분층이고, 경아전은 서울의 관청에서 하급 행정실무를 맡는 축들이다. 양반 사족 아래고, 보통 백성보다는 위에 위치한다. 어떤 경우 이들을 싸잡아 중인이라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대개 서울사람이고 또 사족이 아닌 ‘시정(市井)’의 사람이란 뜻에서 여항인(閭巷人)이라 부른다. 시정의 뜻으로 옛날에는 ‘여항’이란 문자를 썼던 것이다. 서울의 양반관료가 아닌 ‘시정의 사람’이란 뜻이 되겠다.


서울에는 중앙관청이 밀집해 있었던 만큼 양반 벼슬아치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그 아래 양반이 하지 않은 벼슬들이 수도 없이 있다. 곧 그중 가장 중요한 부류가 서리, 곧 경아전이다. 양반관료들은 일단 관리직이다. 구체적인 행정실무는 잘 모른다. 또 벼슬을 하고자 하는 양반 대기자가 워낙 많아서 한 자리에 오래 둘 수가 없다. 아침에 와서 저녁에 옮기는 것이 양반들이 벼슬하는 행태였다.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는 행정이 안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관청의 행정 실무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서리가 중요해진다. 양반 관료들은 흘러가는 물이라면, 서리는 바위다.

서리는 조선전기에는 취재(取才)란 간단한 시험을 쳐서 뽑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이 제도는 시행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울의 큰 양반집, 다른 말로 경화세족(京華世族) 가문의 겸인(청지기)이 서리가 된다. 서리는 비록 말단직이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중앙관서의 업무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귀족가의 겸인을 서리로 삼았으니 조선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썩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행정 실무를 보려면 당연히 한문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시나 한문산문도 지을 수 있다. 이들이 한문학 창작에 뛰어든 것은 대개 17세기 중후반 이후고, 이들이 창작한 한문학을 특별히 여항문학이라 한다.

여항문학을 담당했던 여항문인들의 이름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어떤 관청의 서리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여러 자료를 보고 추적하면 확인이 되는 사례들이 모인다. 하지만 그들이 어느 집 겸인이었는지 밝힐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벼슬도 양반벼슬이 제일이라 어느 관청 서리인 것도 밝히기 꺼리는 판인데, 무슨 자랑거리라고 어느 대갓집 청지기라고 밝힐 것인가? 연구자인 나로서는 그 사례가 나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을 수가 없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만수(李晩秀)의 문집인 <극옹집>을 훑어보고 있는데, ‘음정축서(陰庭軸序)’란 글이 있었다. 읽어보니 1809년 이만수 집안의 겸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신 것을 기념하여 만든 시축(詩軸), 곧 ‘음정축’에 붙인 이만수의 서문이었다. 축은 두루마리를 뜻한다. 모여서 시를 지으면 그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 축이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황소에 싣고 다닐 정도로 큰 시축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직경 30㎝쯤 되는 축을 본 적이 있다. 펼치니 그 속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시와 그림과 글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음정축서’가 흥미로운 것은 한 사람의 양반이 겸인을 얼마나 거느리는지, 또 그 겸인이 어떤 중앙관서의 서리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만수 집안은 소론 명문가였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파(月沙派)로 알려진 이 집안은 월사 이정귀(李廷龜) 이래 사환이 끊이지 않은 명문이었다. 집은 서울 낙산(洛山) 아래 동촌에 있었다. 이 자료를 통해 이 가문에서 거느리고 있는 겸인의 규모를 보자. 이철보(2명), 이길보(2명), 이복원(7명), 이성원(8명), 이시수(5명), 이만수(7명)등 이 집안이 이다. 이철보 이하는 이정신(李正臣)의 후손이다. 즉 이정신―이철보―이복원―이시수·이만수, 이정신―이길보―이성원이 된다. 즉 이정신의 후손 3대가 거느린 겸인의 수가 31명이란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들이 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했던 것이다.

이들은 어느 관청의 서리였던가. 이만수의 예를 들어보자. 이만수는 김진악·전취인·김재묵·김기영·김재만·최정우 등 6명의 겸인을 거느렸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호조의 서리였다. 호조는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호조의 서리는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수입은 관례화된 부정이었다. 19세기 호조 서리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당시 호조 서리 자리는 약 2000냥에 거래되었다. 서리 자리가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자리가 아니었으면 고가에 거래될 리 만무다.

이들이 어떻게 호조 서리가 되었던가? ‘음정축’이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808년 9월 이만수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가 된 이만수가 자신의 겸인을 호조 서리로 박아 넣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 이만수의 영향력으로 호조 서리가 된 자들이 자신의 수입을 독차지했을 것인가? 당연히 자신을 호조에 넣어준 이만수와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정축서’야말로 조선후기 겸인과 경화세족가문의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어느 날 지도교수님이신 경인 선생님께서 희한한 자료를 하나 구하셨다고 했다. 선생님의 자료를 보고 싶을 때는 그 자리에서 금방 말씀드리면 좀 곤란한 것 같아서 언제나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씀드리면, ‘그래, 그러지 뭐’라고 하신다. 역시 그렇게 해서 그 귀중한 자료를 볼 기회를 얻었다. 카메라로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댁으로 찾아갔더니, 조심스럽게 자료를 내놓으신다. 낯선 자료를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약간 흥분하게 된다.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자료를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글이 아닌가. “어, 이거 음정축이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이어 나는 사진을 찍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다. 원본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또 어떠랴. 연구자인 나는 내용만 있으면 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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