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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문헌을 통해 서울의 큰 양반집의 겸인, 곧 청지기가 중앙관서의 서리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구체적인 경우만을 접했을 뿐, 그것이 관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교의 <대한계년사>에서 정말 내가 원하는, 더할 수 없이 정확한 자료가 나왔다. 말하자면 꼭 맞는 열쇠를 찾은 셈이었다.

<대한계년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7년 한국사사료총서의 하나로 간행한 책이다. 구한말의 정계와 사회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책이고 나 역시 관심을 두지 않을 책이었다(지금은 번역본도 나와 있다). 그 책의 한 모퉁이, 그것도 주석 부분에 내가 필요한 자료가 있는 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교보문고의 서가에서 우연히 뽑은 책에서 내가 그렇게 찾던 자료 둘을 동시에 찾았으니, 정말 희한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수습했다. 무엇보다 <벽오당유고>를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또 이 조악한 책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책의 편자를 보니 ‘박박식’이란 분이었다. 뒤에 안 것이지만 ‘박식’이란 이름은 자신이 박식하기에(?) 붙인 이름이고 본명이 아니었다. 책의 출판사도 없었다. 박박식 개인이 그냥 인쇄소에서 찍어 교보문고에 납품한 것이었다. 궁금하여 책 뒤에 실린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엄청나게 반가워하면서 ‘선생과 같은 분을 기다렸소’ 하는 것이 아닌가. <벽오당유고> 운운했더니, 어쨌든 당장 만나자고 했다. 술을 한 병 사들고 그 집으로 찾아갔더니, 일반 주택이었다. 마당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는 종이박스 더미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 종이박스는 집의 거실에까지 쌓여 있었다. 인사를 하고 어떤 이유로 그 책자를 냈는지 물었더니, 먼저 병풍 하나를 내보였다. 아주 잘 쓴 병풍이었다. 낙관은 없었고 ‘소봉(小蓬)’이란 호만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박박식씨는 병풍의 글씨에 반한 나머지 ‘소봉’이 누구인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는 시장에서 점포를 열고 있는 상인이었다. 학계와 끈이 닿을 수가 없었다. 학계와 끈이 닿지 않아도 <한국인명대사전>의 부록을 찾아보면 된다. 부록에는 사전에 실린 인물들의 호가 실려 있으니 소봉이 나수연인 것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길도 몰라 ‘소봉’을 찾아 헤맸고 1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나수연이란 사람이 소봉이란 호를 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병풍을 쓴 사람이 나수연이라고 믿게 되었다. 물론 그 병풍의 소봉과 나수연이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만의 믿음일 뿐이다.

희한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박박식씨는 나수연의 후손을 찾았다. 오랜 시간 뒤 드디어 그는 나수연의 증손자가 경기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집을 찾아갔다. 오랫동안 드나든 끝에 후손과 제법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난정서> 법첩 역시 그 집안에서 얻은 것이었고, 그 법첩이 대단히 귀중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대만의 고궁박물관에까지 보내 감정을 받기도 했다. 그 감정서는 교보문고에서 본 책 속에도 들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나의 기억으로 그는 나수연의 후손을 찾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엉뚱하지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벽오당유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분은 당장 후손을 찾아가 보잔다. 그래서 쇠고기 몇 근을 끊어 들고 경기도에 사는 후손을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주고 점심까지 거룩하게 차려주어 내가 도리어 황송할 지경이었다. 그분은 농사를 짓는 농민으로 정말 순박한 분이었다. 인사 끝에 <벽오당유고>를 보자고 했더니, 그 책은 물론 다른 책과 서화까지 잔뜩 내놓았다. 대원군의 글씨, 최북의 그림,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인 지식인들의 유묵(遺墨)도 잔뜩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름을 들면 알 만한 명사들이 어울려 놀며 지은 시와 그린 그림으로 만든, 직경 30~4㎝ 되는 두루마리다. 편지도 꽤 많이 있었다. 구한말의 것으로 박은식, 장지연 등의 이름도 보였다.

<벽오당유고>는 조선총독부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깨끗하게 정사(精寫)한 것이었다. 나수연이 아마도 아버지 나기의 시문을 모아서 출판하기 위해 정리한 것을 오세창이 어떤 인연으로 빌려 본 것이었다. 후손으로부터 나수연과 나기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삼청동에 서울집이 있었다는 것, 경기도 일대에 몇 만석에 해당하는 거대한 전장(田莊)을 갖고 있는 부유한 집안이었다는 이야기는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었다.

<벽오당유고>는 박박식씨가 중간에서 말을 잘해 그 책을 빌려올 수 있었다. 한 권 분량이었으니 그리 내용이 풍부한 문집은 아니었다. 또 중요한 것은 이미 <근역서화징>에 발췌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자료를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자료는 뒤에 <여항문학총서>를 만들 때 같이 영인해 넣었다. 박박식씨는 따로 <벽오당유고>를 영인해 주고, 그 책을 발견한 공을 생각해 해제에 자신의 이름을 꼭 넣어 달라고 했다. 영인본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박박식씨는 자주 전화를 걸어 채근하곤 했다. 어느 날 전화 속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뇌경색에 걸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다면서 그 책의 영인본을 보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 했다. 이내 영인본을 만들어 그에게 보냈다.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구입한 병풍 글씨의 필자를 찾기 위해 오래 노력한 결과가 나의 연구와 접속하게 됐으니 세상 인연이란 참으로 희한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나는 조희룡이 남긴 자료와 또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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