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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일 새벽 열차를 타고 김해한솔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부산경마장 마필관리사 고 박경근씨(37)를 조문하기 위해서이다. “먹고살 만했던 아들이 왜 가정불화 때문에 목숨을 끊겠습니꺼. 입버릇처럼 ‘사람이 말보다 못하다’고 젊은 관리사들 불쌍하다면서 마사회의 차별적 처우에 분개했어예. 우리 아들 명예회복 시켜주고 관리사들 문제도 살펴 주이소.” 내 손을 꼭 잡고 한참을 말씀하시는 어머님 곁에는 박씨의 부인, 열살배기 쌍둥이 엄마가 맑고 슬픈 눈망울로 묵묵히 함께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고인이 목숨을 끊기 열흘 전에 나의 사무실로 연락을 했는데도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만이 아니다. 일종의 기시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탓이다. 2012년 대선에서 지고 연일 이어지던 노동자들의 사망소식에 열차를 타고 지방에 갔다. 죽음은 2013년에도 계속되어 10월31일 삼성전자서비스센터 수리기사 고 최종범씨(32)가 생을 달리했다. 부인에게 전화로 어린 딸 별이의 목소리를 들려달라 했다는 그는 카톡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 그날 오전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삼성전자서비스 사장에게 노동탄압과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질의를 막 끝낸 내게도 그 유서가 전해졌다. “배고파서 못 살았고 다들 너무도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유서를 읽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에 눈물조차 말랐다. 바로 그 기억이 고 박경근씨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를 받자 되살아나 장례식장 가는 길 내내 계속되었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19대 국회의 기억을 물으면 장례식이라고 답하는 이유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시민들, 세월호의 아이들, 인턴과 알바와 하청으로 뛰는 청년들을 장례식에서 만났다. 누구는 영정사진이고 누구는 유족이며 누구는 문상 온 손님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했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두 번째는 고공농성장이다. 수십미터 철탑이나 건물광고판에 오르고 또 올라 제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던 사람들, 몸을 묶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운 그곳에서 수십 수백 일을 견뎌야만 언론에 한 줄이라도 소개된다며 포기하지 않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19대 국회였다.

장례식장과 고공농성장을 찾는 것이 잘하는 일만은 아니다. 국회의원이면 자신이 있는 자리, 바로 의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이다. 모든 인권유린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게 SOS를 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살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이다. 그런데 매번 늦는다. 문제를 해결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삶이 무너지는 속도에 비교하면 항상 늦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이기고 싶었다. 모든 것을 일거에 바꿀 수 없을지라도 바뀔 것이라는 희망,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 아이들이라도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겠다던 절망이 1년은 버텨보자는 다짐으로 변한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온 힘을 다해 다른 길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또 열차에 몸을 실었으니 기시감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져서 탄 열차를 이기고도 또 탔으니 결국 바뀐 것이 없는 것 아닌가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올라오는 길은 달랐다. 내 손을 잡아주는 유족들의 눈빛 때문일 수도 있다. 정치가 무슨 소용이냐며 불신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이 ‘할 수 있다’ ‘기다리겠다’ ‘함께하겠다’고 오히려 격려하는 것도 이유이다. 2002년 촛불이나 2008년 촛불광장 모두 결론은 ‘정치 불신’이었는데 2016년 촛불광장에서는 ‘정치 참여’로 완전히 바뀐 것처럼 말이다. 19대 국회 때는 나 혼자만 허공에서 소리를 지르나, 묻곤 했는데 20대 국회에서는 문자폭탄이든 문자행동이든 이제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필리버스터와 총선 때부터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밀려온 것 같다.

그렇게 용감한 시민들 덕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고 정책과 정치인이 종종 실검 1위에 오른다.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시작할 수 있고 좋은 일자리와 최저임금 1만원이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대두되었다. 일자리를 늘리고 불평등을 없애겠다는 정부에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보수언론의 비난은 여전하지만, 시민에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정치는 이제 되돌릴 수 없다. 전국에서 강연요청이 계속 들어오는 것도, ‘여러분의 시대가 온다’고 강조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장례식장 방문 다음 일정이던 부산대 강연에서도 그러했다. 기쁨보다 슬픔을, 즐거움보다 고통을 더 기억하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이번만은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성취이기에 깊이 새겨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기시감을 털어내고 승리의 순간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물론 휴대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뜰 때마다 ‘또 무슨 일이?’라는 두려움이 배어드는 것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달라졌다. “이번에 ○○에 입점하는데 수수료만 31%이고 운영비까지 합하면 40%가 넘어요. 좀 낮춰 달라 했더니 ‘그래도 너희는 망하지 않잖아’ 하는 거예요. 을이 죽어도 또 다른 을이 있으니 수수료를 낮추진 않겠구나 싶어서 달라져 보려구요.” 오랜만에 찾아와 담담하게 웃던 후배처럼 말이다. 일터도 삶터도 아직 크게 변화가 없는데 사람들은 어제의 그들이 아니다. 미세먼지가 자욱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왠지 숨쉬기가 쉬운 것은 우리가 바뀌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자신감 충만한 시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꿀 것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매년 1조원이 넘는 임금체불, 하루 6명꼴의 산재, 정규직 대비 60퍼센트에 불과한 비정규직 임금, 최저임금 미만자 200만명, 사회보험 사각지대 400만명 등 숫자로 드러나는 불평등의 현실을 떠올렸다.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지워 가다 보면 언젠가는 편안히 열차에 몸을 실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처럼 말이다.

은수미 사회학 박사·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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