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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고 되돌아보면 떠오르는 한 토막의 풍경이다. 내 고향은 덕유산의 무릎 저 아래에 자리 잡은 아주 궁벽한 촌동네. 천방지축 뛰놀며 철없이 자랐다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필통소리와 함께 책보 집어던진 뒤 찬물에 후다닥 밥 말아 먹고 소먹이를 하러 가는 것. 소를 산으로 몰고 가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동무들과 멱을 감고 소를 찾으러 나섰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에 젖은 꼴(풀)을 망태에 대충 담고 서둘러 소를 풀어논 골짜기로 흩어졌다. 아뿔싸, 모두들 소를 찾아 고삐를 붙들고 집으로 내려가는데 아무리 헤매도 우리 송아지는 찾을 수가 없지 않은가. 축 처진 어미소의 꼬리를 따라 힘없이 처진 어깨로 동네로 돌아오니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소는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무덤가로 가 보아라.
다음날 새벽 아버지와 함께 소를 앞장세우고 골짜기로 갔다. 음매음매. 아주 낮고 낮은 울음으로 어미가 새끼를 부르니 어느 무덤가 덤불에서 송아지가 뛰어나왔다. 밤의 적막과 어둠의 공포 속에서 밤새 바들바들 떨었을 송아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잠 못 자고 뒤척이던 어미소. 서로 부둥켜안지는 못했지만 밤새 되새김질하던 혀로 어미는 새끼를 닳도록 핥았다. 그때 그 현장을 지켜보던 꽃이 있었다. 몇 해 전 무덤 속으로 드신, 어쩌다 용돈 조금 드리면 꼬깃꼬깃 접어두었다가 손자한테 그대로 전해주시던 내 외할머니 같은 할미꽃. 저기 저만치 피어 있는 할미꽃을 보고 어, 저기 할미꽃이 피어 있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힘겹게 서 있는 할미꽃을 그렇게 단순한 한 꽃송이로만 처리하면 놓치는 게 너무 많아 원통하지 않을까? 무덤가에서 너무나도 많은 기억과 세월을 감당하느라 등이 움푹 휜 할미꽃.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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