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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리산은 봄철 산불조심 기간이어서 통제구간이 많다. 피아골 농평마을에서 출발해 황장산을 거쳐 쌍계사 근처 모암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걸었다. 황장산은 말하자면 지리산의 발치쯤에 자리한 산이다. 인위적으로 구분한 국립공원에 속하지는 않지만 엄연히 ‘지리 대가족’의 일원이다. 3월 중순임에도 산에는 눈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밑에서 보면 적설이 상당한 곳도 막상 올라보면 눈은 관목의 하부를 붙들고 겨울의 패잔병처럼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 이곳의 눈은 아직도 발목까지 푹푹 빠질 정도였다. 지리산 자락이라 획기적인 야생화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당재를 지나면서 접었다. 높은 나무에서 녹는 눈이 눈을 때려 눈밭이 곰보처럼 움푹움푹한 사이로 작은 발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요란한 등산화 자국에 비해 어느 짐승의 단정한 발걸음들. 먹이를 구하지 못한 겨울철의 허기가 얄팍한 발자국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멀리 쌍계사가 보이고 오늘의 산행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을 때였다. 작은 비탈의 고개를 돌아드는데 몇 발짝 뒤에서 들리는 외침. 야, 히어리 밭이다! 자생하는 히어리는 귀한 꽃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몇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멸종위기식물이었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주렁주렁 달기에 이름에도 받침을 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라시대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고 한다. 히어리, 아랫도리가 허전한 그러나 참 아름다운 그 이름을 듣고서 혹 이 나무는 꽃들이 빈약하지나 않을까, 졸렬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더랬다.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피어나면서 여러 층층의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히어리. 코끝에 바싹 대어도 이렇다 할 향기는 풍기지 않았지만 무망할 뻔했던 산행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준 히어리. 조록나무과. 한국 특산의 낙엽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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