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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망울을 터뜨리는 백목련. 담장을 기웃거리는 매화. 동백은 벌써 지는가. 담 아래 떨어진 통꽃이 즐비했다. 속절없이 이어지는 남도의 마을 풍경. 완도대교를 지나 왼편의 납대대한 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동네 입구의 길가에서 범상치 않은 간판을 보았다. 시동을 끄고 내리니 양지 끝에 자리 잡은 교인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님이 누워 잠든 모습을 닮았다는 숙승봉(宿僧峰). 그 작은 산 아래 양지바른 곳이었다. 지금 나는 완도식물조사단의 일원으로 어제는 완도의 최고봉인 상황봉에 올랐고 오늘은 산자락의 식생을 살펴보는 중이다. 남도 끝의 섬이라지만 맵싸한 추위가 발톱을 숨기고 있어 야생화는 아직 더딘 걸음이었다. 울타리처럼 마을 수로가 돌아나가고 그 곁으로 꽃들이 총기있게 피어났다. 발끝에 차이는 봄꽃들! 시궁창 냄새도 묻어나는 터라 꽃들은 씨알이 굵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간판 아래로 갔다. ‘차 한 잔의 여유 있는 공간’. 타이탄 트럭을 개조한 가게였다. 종업원 대신 강아지를 데리고 혼자 운영하는 주인은 별말이 없었다. 꽤 까다로운 질문을 해도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문을 하고 실없는 농담 끝에 어렵사리 얻은 몇 마디. 완도에 시집온 지 몇 해 안된 새댁이라 했다. 친정은 경남 진주라 했다. 있을 게 없어서 그렇지 살기는 좋은 곳이라 했다. 커피를 받아들고 간이의자에 앉는데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백석). 스님의 어깨를 짚고 쏟아지는 햇살이 몹시도 푸짐한 가운데 큰개불알풀, 왜제비꽃, 동백꽃들 옆에서 먹는 커피맛이란! 그중에서도 유독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야생화가 있다.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꽹과리 가락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것 같은 광대나물. 설탕이 모자랄 때 하나 뽑아서 빨면 단맛이 쪽쪽 나는 광대나물. 꿀풀과의 두해살이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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