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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끼니를 때운다. 새싹에 초고추장을 끼얹은 비빔밥이거나 ‘틉틉한’ 고깃국물에 양념장을 푼 설렁탕 혹은 가정식 백반. 오늘은 청국장이다. 점심 메뉴가 매일 달라도 마무리는 늘 같다. 이쑤시개로 입안에 남은 음식을 마저 먹는 것. 주말이면 먼 산에 가서 목을 길게 빼고 나무의 신분을 알아내려 한다. 가지 끝에 정보가 많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 버릇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서울에 와서도 버릴 수가 없다. 본래를 잃고 날카로움만 남은 채 플라스틱통에 쑤셔 박힌 이쑤시개의 고향이 문득 궁금해졌다. 이것은 무슨 나무였을까.

작년 가을 가야산 소리길을 걸어 해인사에 도착했다. 대장경세계문화축전 중 장경각을 개방했다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후박나무로 만들었다는 대장경판을 눈으로 쓰다듬듯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법보전에는 주련이 있었다. 8만여 경판을 압축하고 요약하여 얻는 열두 글자인가.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원융한 깨달음의 장소는 어디인가. 살고 죽는 지금 여기가 바로 그 자리). 장경각 후문으로 나오니 달려드는 나무 한 그루. 해인사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형한테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나무였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놓고 신선이 되었는데 그 지팡이가 우렁차게 되살아났다는 전설 속의 전나무였다.

나의 마지막 식사는 성찰을 동반한 되새김질과는 거리가 있는 동작이다. 입안에서 임무를 마친 뾰족한 나무를 꺼내 분지를까 하니 조금 미안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잔반으로 보내면 돼지 목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문득 해인사의 전나무가 좋은 꾀를 가르쳐주었다. 청국장 식당 옆에는 작은 화단이 있다. 파릇한 괭이밥 옆에 꽂으니 감쪽같이 들어갔다. 곧 거름이야 되겠지만 혹 모르는 일이다. 나의 이쑤시개도 최치원의 지팡이처럼 아니 되란 법 없는 것을. 그땐 이 나무의 후생을 동정(同定)할 수 있으리라. 행여 전나무일까! 소나무과의 상록교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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