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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주한미군으로 자리를 옮겨온 지도 어느덧 13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예전 소방서에서 출동하던 꿈을 꾸곤 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깨지만 꿈 속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여러 사고현장을 경험했다. 그때 쌓였던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해서 어려운 시간도 보냈다. 그 한 예가 바로 내 아이를 놀이터에 데리고 다니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놀이터라는 곳은 온통 사고의 기억으로만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집 사람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각종 재난 현장에 출동하는 소방관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부상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기도 하며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하는 일이 다반사다. 아무리 훈련받은 소방관이라고 하더라도 충격적인 장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되면 악몽, 수면장애, 집중력 저하, 술 또는 담배 의존, 대인관계 갈등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적절한 치료 없이 방치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로 이어진다.

2014년 소방방재청에서 발간한 <소방공무원 직무스트레스와 PTSD> 자료를 살펴보면, 일반인의 경우 PTSD 유병율이 5% 수준이지만, 소방관의 경우 자그마치 35%에서 40%에 달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방관은 용감함의 상징이자 영웅이란 이미지가 부각되어 왔다. 그런 이유로 현장에서 겪은 모든 일들을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다. 감히 PTSD에 대해 논의를 한다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올 것이라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이 건 _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그리고 경제적 고통 등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정신건강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소방관은 소방관이기 이전에 평범한 인간으로써,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여기에 직업특성상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한 달에 20일 이상 출동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모든 소방관이 PTSD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TSD는 여러 가지 면에서 소방관을 괴롭힌다. 우선은 소방관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고, 조직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더욱 심각한 것은 PTSD로 인해 고통 받는 모습이 무의식중에 내 가족 또는 주위의 친구들에게 전파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일선 소방서에서는 PTSD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편백나무로 만든 산소방을 운영하는가 하면, 음악이나 미술을 활용한 힐링캠프,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에코힐링 그리고 스키와 같은 스포츠를 접목한 힐링프로그램 등도 있다.

다양한 형태로 소방관의 정신건강을 챙기는 모양새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설령 보다 자주 PTSD 예방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해도 근무여건상 계속되는 출동 등으로 그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적절한 시기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PTSD를 예방하고 관리할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현장에서부터 소방대원의 PTSD 예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고현장에 성직자들이 출동하는 것이다. 재난현장에서 심리적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소방대원들에게 상담과 기도를 통해 정신적으로 지지해 주고 있으며, 성직자들의 이런 헌신과 봉사는 재난현장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한다.

또한 소방대원이 순직을 했을 때에는 성직자와 심리상담가들이 소방서 청사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동료 소방대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필요하다면 기도도 해 준다. 이런 모든 일련의 행동들이 PTSD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조언해 주는 것처럼 PTSD는 단순히 인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음주나 흡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PTSD로 고통 받는 것은 결코 나약한 모습도 아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많은 소방관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의 고통을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솔직하게 PTSD를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정부에서도 소방관들이 PTSD를 해소하고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해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현명한 PTSD 예방과 관리를 통해 소방관 개개인의 삶의 질도 높아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기대해 본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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