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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에서 근무하다보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국소방에 관한 자문을 요청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비록 보잘것없는 소견이지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과 깨달음은 공유할 때 그 빛을 발한다>라는 개인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민국의 안전에 일조한다는 소소한 개인적 만족도 한 몫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급하게 자문을 요청하고 관련 자료를 보내주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우는 미국자료를 요청하면서 번역까지 부탁을 받았을 때는 소위 멘탈이 붕괴되는 경험을 맛본 적도 있다.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보내준 자료는 잘 받았는지 그래서 그 자문이 프로젝트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필자의 넓은 오지랖에 기인한 서운함이 생기기도 한다.

학창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친구의 숙제를 빌려 약간의 편집을 가한 뒤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제출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친구의 고민과 노력의 시간들을 그저 친구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대가없이 사용했던 것이다.

가끔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정말 주옥같은 연구 자료들을 볼 때가 있다. 내 것처럼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필자 역시 2권의 졸저를 세상에 내면서 나름 적지 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으니, 그런 나의 땀과 노력의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마치 자기 것인 냥 허락도 없이 가져다 사용한다면 나 역시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자문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물론, 이런 도움들에 대해서 모두다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조언을 일일이 값으로 환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자문을 해본 사람들만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다. 금전적 보상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만든 결과물에 대한 진심어린 존중과 인정이 필요하며, 반드시 누구의 것인지 명확한 출처를 밝혀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어느 한 주제에 관한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제시하려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살펴야 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이 담긴 스토리를 만들어서 현실적인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그저 몇 마디 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몇 마디를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노력의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덕분에 내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 경험이 있다. 너무도 소중한 그 말 한마디는 누군가의 오랜 경험과 깊이 있는 성찰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어느 한 주제를 가지고 자그마치 3년이라는 시간을 고민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나니 이제는 한 두 마디로 쉽게 정의내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고생한 시간을 생각하면 솔직히 남에게 공짜로 말해주기 아깝기도 하지만, 지식과 깨달음은 서로 공유할 때에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죽어서 전부다 무덤에 가지고 갈 수도 없으니 평소 줄 수 있을 때 기분 좋게 나눠주면 그뿐이다.

언젠가 한 소방서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다가 내가 만든 자료가 출처도 표시되지 않은 채 게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물론, 좋은 뜻에서 올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않지만, 그래도 타인의 노력을 인정하는 출처 정도는 밝혀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누군가가 노력해서 만든 결과물은 아무리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동의를 받아야 한다.

지인들과 하는 농담 중에 <인간 모기>라는 말이 있다. 살며시 다가와서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모기처럼 살며시 다가와서 본인이 필요한 것들을 아무런 대가없이 듬뿍 빨아먹는 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소방이라는 좁은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밖에 없다. 그 날에 서로 서먹서먹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다른 이들의 고민과 노력의 시간들을 기꺼이 존중해 주어야 한다. 누군가의 땀과 노력, 고민, 열정, 꿈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까지도 이제는 존중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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