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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은 집안 분위기가 어딘가 모르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가구도, 벽지도 그대로였는데, 그런데도 그 느낌을 지울 길 없었다. 뭐지? 진만은 마치 마감 후 물품이 맞지 않은 알바생처럼 다시 한번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변할 것도, 달라질 것도 없는, 지은 지 삼십 년 된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이었다. 군데군데 금이 간 마룻바닥과 누리끼리하게 변한 싱크대 위 타일들, 그리고 흐릿한 형광등 불빛까지,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이상하네? 진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거기, 침대 바로 앞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사극이었다. 진만은 가만히 할아버지를 따라 TV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야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삼계탕집 주방 알바를 그만두고 진만은 오랜만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단둘이 살고 있는 안양집에 들렀다. 그가 근무했던 삼계탕집은 추석 당일 하루만 쉬었다. 그러니 어디 갈 수가 있나? 생각해보니 설날에도 그랬고, 여름휴가 때도 그랬다. 알바는 남들 쉴 때 더 일이 많은 법. 꼭 일 년 만에 가는 안양집이었다. 같은 계절이어서 그런가, 별다르게 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봄에 오면 좀 다르려나? 진만은 그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어디 안 좋으세요?”

진만은 마침 앉은뱅이 밥상에 이른 저녁을 차려 안방으로 들어오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연립주택 인근 오피스텔 야간경비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밥상에는 진만이 왔다고 그랬는지 제육볶음과 쌈이 올라와 있었다. 

“왜? 뭔 일 있었어?”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쪽을 힐끔 한번 바라보고 되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를 보고도 통 말씀이 없으셔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만은 다른 것을 묻고 싶었다. 이 냄새, 예전과 달리 집에서 나는 이 냄새는 과연 무엇인가? 비릿하고, 고릿하기도 한 이 냄새가 왜 계속 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예전엔 저만 보면 계속 이 말 저 말 물었는데….”

아버지는 묵묵히, 그러나 바쁘게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몰라. 요즈음 저렇게 자꾸 깜빡깜빡하셔.”

“병원엔 안 가보셨고요?”

진만은 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TV를 보며 느릿느릿 숟가락을 들었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야. 나도 깜빡깜빡하는데, 뭘….”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진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팔십대, 그의 아버지도 이미 육십대였다. 냄새에는 아마 그 두 사람의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출근한 후, 진만은 설거지를 마치고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 재밌어?”

TV에선 계속 사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응. 궁예가 이제 막 다른 미륵이 있다고 왕건을 의심하기 시작할 거야.”

진만은 멀거니 TV 속 애꾸눈 궁예를 바라보았다.

“네 아빠도 이 할아비를 자꾸 의심해.”

할아버지는 마치 은밀한 소식이라도 전하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아버지가요?”

“응. 내가 가짜 가시오가피즙을 산 거라고… 자꾸 날 의심해.”

진만은 곰곰 따져 보았다. 분명 그런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문화홍보업체에 속아 삼백만원어치 가시오가피즙을 사 들고 들어왔을 때가…. 하지만 그건 진만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의심하는 게 아니고 할아버지…그냥 너무 비싸니까 속상해서 그랬지.”

“나도 속상하거든. 그게 뭐 나 먹으려고 산 건가? 고생하는 우리 아들 먹이려고 한 거지.”

진만은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할아버지는 옛일을 추억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지금을 옛날로 믿고 있는 걸까? 진만은 어쩐지 꼭 후자일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어떻게 저렇게 방금 당한 일처럼 속상해할까? 진만은 그 생각을 하니까 왈칵 겁이 났다.

“할아버지, 요샌 뉴스 안 봐?”

“안 봐.”

“왜? 할아버지 맨날 뉴스만 봤잖아?”

“보면 속상해. 맨날 디제이만 나오고… 디제이 대통령 된 거 꼴 보기 싫어서 아예 안 봐.”

TV에선 다시 궁예가 자신을 보고 미륵이 아니라고 말하는 고승에게 마군이구나, 노여워하는 모습이 잡혔다.

다음날 오전, 진만은 퇴근한 아버지를 잡고 말했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병원 모시고 가야 할 거 같아요.”

“왜? 너한테 뭐라고 그러셔?”

“자꾸 옛날 일만 말하세요.”

아버지는 잠옷으로 갈아입다가 잠깐 진만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 잘못된 거야?”

진만은 아버지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게 그냥 놔두면… 진만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끝을 흐렸다.

“놔둬. 병원에 가봐야 약도 없고… 우리 둘 사는데 옛날 일 말한다고 잘못될 것도 없어.”

진만은 그런 아버지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속상한 거 있으면 속상해하고, 화낼 거 있으면 화도 내야지.”

아버지는 잠옷 차림 그대로 할아버지의 아침 밥상을 차렸다. 

“걱정 말고 너도 밥 먹고 얼른 내려가. 아직까지 아무 문제없어. 태조 왕건도 있고… 저 드라마 계속 재방송해. 그러니까 괜찮아.”

진만은 아버지를 도와 밥상에 수저를 놓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이 속상했을까? 나는 또 나중에 그 속상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만은 그게 막막하기만 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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