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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외교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한국의 평화와 번영은 주변국과의 화해·협력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운명이다.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한국은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로부터 전 방위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평소 경쟁하고 대립하던 정치세력들이라도 이런 때는 힘을 합치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없다. 한국의 창의적인 정치인들은 이때야말로 상대를 몰아붙일 좋은 기회로 여기며, 공동의 적을 잊은 채 서로를 적이라고 부른다. 

여야는 지금 결투로 승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팽팽히 대치하고 있지만 뜯어보면 외교정책 차이는 크지 않다. 일정한 재임 기간을 갖는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정책의 폭은 제한적이고, 대격변이 닥치지 않는 한 누가 집권해도 국익에 관한 정의, 동원 가능한 자원, 협상 수단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정학의 지배를 받는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당은 외교정책을 전면 폐기하라고 정부를 공격하지만, 그들이 집권한들 말대로 하기는 어렵다. 외교정책만큼 집권세력에 대해 비탄력적인 것이 없다. 

일본의 무역보복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너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야당이 대책이라며 내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특사 파견, 한·일 정상회담 개최, 한·미·일 공조 복원이다. 문제의 핵심과 무관한, 협상 전술에 관한 것으로 정부에 맡기면 될 일이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에 더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야당이니까 하는 말에 불과하다. 야당이 집권했다 해도 주변국 모두와 동시에 대립을 심화시키는 행동은 하지 못한다. 

여야 간 차이가 커 보이는 게 있기는 하다. 대북정책이 대표적이다. 자유한국당은 정부의 비핵 평화정책 전면 수정,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합의 파기를 주장한다. 그건 남북관계에 파국을 부르는 일이다.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그저, 자기 이념의 표현, 차별성·존재감 과시를 위해 대북정책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차이는 대북정책 방향이 아닌, 특정 현안과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이 초당 외교 거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게 초당 외교다. 초당적 대응과 협력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외교 실책이 있으면, 야당으로서 당연히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면한 외교 현안을 해소해야 할 시급성·중요성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당파성이 필요하다 한들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굳이 나서서 대통령을 ‘적’이니, ‘안보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니 비난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끌겠다고 준비하는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대외관계의 난제를 헤쳐 나가야 할 대통령을 흔들어 나무에서 떨어뜨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이다. 정부·여당 또한 야당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내려 노력했어야 한다. 야당 존중 없는 초당 외교는 가능하지 않다. 정부·여당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야당이 알아서 도와주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초당 협력은 야당에 대한 청구권이 아니다. 대야 압박 수단도 아니다. 대야 압박 공세와 초당 협력은 병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권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이분법으로 제1야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격적 언어를 구사했다. 한국당이 남북 화해·협력 문제를 친북이냐 반북이냐 이념 문제로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접근법이다. 정부가 초당적 지원을 받으며 일본의 도발에 대처해야 한다는 건 반일이 아니라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교 문제를 정당 정체성 혹은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게 내부 정치 싸움에 효과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외교 현안 해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사람들은 외교 문제가 국내 갈등을 초래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국내 갈등의 불쏘시개로 외교 문제가 동원됐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무엇이든 끌어들여 충돌을 일으키는 게 한국의 정치 공간이다. 외교 문제 해결의 중심축이 굳게 세워지는 대신 반일과 친일, 애국과 이적, 여와 야의 대립 축이 우뚝 서 있는게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이다. 

외교 문제가 내부 문제로 수렴되고, 모두가 내부 투쟁에서의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안정한 대외 정세에도 한국인의 시선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 있다. 모두 ‘한국 정치’ 때문이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놔야 한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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