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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설날이 지나갔다. 입춘이 코앞이고 대보름이 바라보인다. 대보름도 지나면 2월14일, 한순간에 대중의 일상에 파고든 밸런타인데이가 온다. 이날을 유래불명, 국적불명, 정체불명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중은 어느새 이날을 명절로, 기념일로 만들어버렸다.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 유래. 불분명하다. 황제가 군인의 혼인을 금지했다고?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다. 이날의 아버지라는 발렌티노가 여러 발렌티노 가운데 과연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다. 국적. 불분명하다. 최근 100년 유럽 여기저기에서 이날은 연인뿐 아니라 가족과 친지를 위한 기념일이었다. 이날이 연인을 위해 돈 쓰는 날로 변한 곳은 미국이다. 여기에 일본이 초콜릿을 더했고, 대만과 한국이 일본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대륙 중국에서도 전통적인 대보름과 칠석을 따돌리고 연인의 기념일로 자리를 잡은 눈치다.

다만 정체를 따지기란 만만찮다. 한국인이 공동체가 부과한 의무와 부담에서 벗어난 명절을 누려본 적이 있었나. 사랑, 연애, 애틋한 마음, 수줍은 고백, 에로티시즘에 집중한 하루가 있었나. 화려한 과자라든지 꽃송이 같은 명시성 강한 물건을 손에 든 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거리를 활보할 기회는 있었나. 이날이 출처 불분명하고, 별안간 주어졌으며, 상품 판촉 활동에 잇닿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국에서, 대중에게, 정체만큼은 분명하다. 이날은 갑오개혁을 지나서도, 해방을 지나서도 없었던 ‘연인의 날’이다. 너랑 나랑 둘이서 주인공이 되는 하루를 바란 대중의 마음이 만든 날이라는 속내가 있다. 해방 이후 특정 종교와 정부가 손잡고 일방적으로 선포한 몇몇 공휴일보다 그 속내가 훨씬 선명하기도 하다.

초콜릿도 읽어볼 만한 주제다. 과자는 인류 음식 문화사의 진화와 함께 꽃핀 문명의 꽃이다. 과자를 못 먹는다고, 안 먹는다고 죽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기어코 과자를 만들고, 과자를 먹는다. 밥, 빵보다 훨씬 많은 비용과 노동을 들여 굳이 만들어냈고 먹었다. 과자는 택할 수 있는 한 그 풍미, 질감, 형태 모든 면에서 화려한 쪽을 택하는 음식이다. 생존과 상관없는 명시적인 색상, 밑도 끝도 없이 품을 들여 이룩하는 조형미, 오로지 쾌락으로 수렴하는 단맛 중심의 풍미가 과자의 삼박자다. 생존만을 위해 이루고 먹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노는 인간, ‘호모루덴스’를 단박에 드러내는 음식이기도 하다. 과자 가운데서도 초콜릿은 과자 세계의 정점에 선 과자이다. 판촉을 처음 기획한 사람이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초콜릿을 가져다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사이를 위해 이만한 정표도 다시 없을 것 같다. 아무려나, 이제 반전이 필요하다. 이왕 벌어진 판에서 보다 지혜롭게 나와 너의 하루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서, 초콜릿의 녹는점은 체온과 같다. 입속에 넣었을 때 이물감 없이 사르르 녹아 풀리고 특유의 단맛과 향이 올라오는 과자, 그게 초콜릿의 조건이고 정체다. 식물성유지, 레시틴, 합성착향료는 유사초콜릿 또는 준초콜릿에 들어가는 첨가물일 뿐이다. 초콜릿은 카카오버터, 카카오매스, 설탕 이 세 가지 원료로 충분하다. 밀크초콜릿은 분유만 더한다. 오늘날 상품의 가격대란 넓게 벌어지게 마련이고, 소비자도 저마다 형편에 맞는 소비를 해야 할 테지만, 그래서 유사초콜릿 또는 준초콜릿도 필요하지만, 한 번쯤 나와 너를 위한 사치를 하겠다면 원재료만큼은 한 번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딱 두 가지다. 초콜릿의 녹는점이 사람 체온과 같다는 점, 초콜릿에는 원래 카카오빈에서 나온 카카오버터 이외에 어떤 다른 유지도 쓰지 않는다는 점. 이를 기억하면 ‘예뻐서’ 샀는데 어이없이 ‘비싼 거’를 사는 어리석음은 조금 줄일 수 있다. 굳이 초콜릿의 원료인 ‘커버처’를 구해, 내 손으로 초콜릿을 만들 분들은 제과가 어마어마한 기술 숙련의 세계임을 실감하는 보람까지 거두길 바란다. 전문 초콜릿 제과사는 대리석에 섭씨 40도에서 50도로 녹인 액상의 초콜릿을 부어놓고, 다시 27도쯤에서 굳기를 기다려 순간적으로 작업을 해낸다. 초콜릿은 워낙 사람 손을 잘 타야 잘 나오는 과자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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